
이 글은 현대인이 당연하게 여기던 자유의 이미지를 들뢰즈 철학을 통해 낯설게 만들고, 그 틈에서 ‘진짜 자유’의 조건을 다시 묻는 작업을 목표로 합니다. 현대 사회는 개인에게 무한한 선택과 자기계발을 약속하지만, 많은 사람은 오히려 불안과 피로를 자유의 다른 얼굴로 경험합니다. 이 글은 그 이유를 들뢰즈의 개념들, 예를 들어 욕망, 되기, 탈영토화, 리좀 등의 언어를 빌려 설명하고자 합니다.
독자는 이 글을 통해 들뢰즈가 말하는 자유가 단순한 “하고 싶은 대로 하기”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들뢰즈에게 자유는 고정된 자아가 자기 방식으로 세상을 소유하는 상태가 아니라, 삶이 끊임없이 다른 가능성과 접속하고 변형되는 과정입니다. 이 글은 철학 이론 설명에만 머물지 않고, 회사, 관계, 디지털 환경 등 일상 속에서 들뢰즈적 자유를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장면과 전략을 제시합니다.
글의 구조는 개요, 서론, 본론, 결론, 마무리의 다섯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본론에서는 네 개의 축을 중심으로 서술이 진행됩니다. 첫째, 통념적인 자유 개념을 의심하는 들뢰즈적 시선을 살핍니다. 둘째, 욕망과 되기 개념을 통해 진짜 자유의 조건을 재구성합니다. 셋째, 탈영토화라는 핵심 개념을 일상 사례와 연결합니다. 넷째, 리좀적 사고를 통해 실천 가능한 자유 전략을 제안합니다.
자유에 지친 시대와 들뢰즈의 질문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자유를 원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의 몸과 마음은 자유가 아니라 과부하 상태에 가까운 경우가 많습니다. 사회는 개인에게 “무엇이든 될 수 있다”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그렇다면 빨리 증명하라”라고 재촉합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선택한다고 믿으면서도, 선택의 순간마다 타인의 시선과 알고리즘의 추천, 시장의 기준을 의식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자유가 넘쳐 보이지만, 일상 깊숙한 곳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피로감과 죄책감이 쌓입니다.
많은 사람은 자유를 선택의 개수로 계산합니다. 사람들은 옵션이 많을수록, 이동이 쉬울수록, 계정과 플랫폼이 많을수록 자신이 더 자유롭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이상한 모순을 경험합니다. 분명히 선택의 폭은 넓어졌는데, 삶은 더 유연해지기보다는 더 빡빡하고 경직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회사는 유연근무제를 도입하지만, 사람들의 머릿속은 24시간 업무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퇴사도 선택”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대출과 이력서, 나이의 벽을 떠올리며 무엇 하나 쉽게 움직이지 못합니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는 이러한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독특한 언어를 제공합니다. 들뢰즈 철학은 자유를 “통제에서 벗어난 상태”로만 보지 않고, “새로운 접속을 만들어가는 능력”으로 이해합니다. 들뢰즈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통제에서 해방되었는가가 아니라, 나의 욕망과 삶이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고 생산되는가입니다. 이 글은 들뢰즈의 이런 관점을 빌려, 우리가 실제로 추구하는 ‘진짜 자유’가 무엇인지 천천히 짚어 보려 합니다.
이 글은 독자가 철학 전공자가 아니어도 이해할 수 있도록 들뢰즈의 핵심 개념을 일상 언어로 풀어냅니다. 독자는 난해한 개념을 외우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들뢰즈의 언어로 다시 번역해 보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독자는 자유를 둘러싼 통념을 의심하게 되고, 지금 이 자리에서 시작할 수 있는 작은 자유 실천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들뢰즈 철학으로 다시 묻는 진짜 자유
1. 자유에 대한 통념을 의심하는 들뢰즈적 시선
들뢰즈 철학은 자유를 말하기 전에 먼저 우리 안에 이미 굳어져 있는 자유의 이미지를 흔듭니다. 사람들은 자유를 너무 빨리 “내 마음대로 함”과 연결합니다. 하지만 들뢰즈는 마음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사회와 권력, 담론, 미디어, 가족 구조 속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들뢰즈에게 자유는 “내 마음대로”가 아니라 “마음을 새롭게 만들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들뢰즈적 시선은 자유를 개인의 속성이라기보다 관계의 양식으로 이해합니다. 한 개인이 아무리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어도, 그 개인이 들어 있는 관계망이 특정 방식으로만 욕망을 허용한다면 그 사람의 자유는 이미 크게 제약됩니다. 예를 들어 회사 안에서 사람은 스스로 자율적으로 일한다고 느끼지만, 평가 시스템과 목표 관리 구조가 욕망의 방향을 이미 정해 놓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람의 의지는 시스템이 요구하는 방향으로 스스로를 조정하는 능력으로 변합니다. 들뢰즈는 이런 미세한 조정 과정까지 자유 논쟁의 중심에 놓습니다.
1-1. 선택이 많을수록 자유라는 착각
현대 사회에서 많은 사람은 선택지를 자유와 거의 동일시합니다. 사람들은 쇼핑몰에 상품이 많을수록, 스트리밍 서비스에 콘텐츠가 많을수록, 플랫폼에 계정이 많을수록 자유롭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들뢰즈적 관점에서 보면 선택지는 자유의 조건 중 일부일 뿐이며, 때로는 자유를 가리는 화려한 포장지가 되기도 합니다.
들뢰즈 철학은 사람의 욕망이 선택지 앞에서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지를 만들어 내는 힘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진짜 자유는 주어진 리스트에서 고르는 능력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진짜 자유는 리스트 자체를 바꾸거나, 리스트 바깥의 가능성을 상상하고 실험하는 능력과 더 깊이 관련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은 직업 목록 안에서 “조금 더 나은 조건”을 찾는 데만 에너지를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들뢰즈적 자유는 “어쩌면 일의 방식을 통째로 다르게 구성할 수도 있다”라는 질문을 꺼내는 순간에 더 가깝습니다.
사람이 선택이 많은 환경에서 피로를 느끼는 이유는 단순히 정보량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은 선택할 때마다 책임과 불안을 함께 떠안습니다. 선택지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사람의 실패 가능성 역시 늘어납니다.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 “내가 고른 모든 것이 곧 나의 능력과 정체성”이라고 느끼며 자신을 끊임없이 평가합니다. 들뢰즈는 이러한 자기 평가의 압박 속에서 자유가 오히려 축소된다고 말할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합니다. 사람은 더 많이 고르지만, 점점 비슷한 것들만 고르게 됩니다.
1-2. “너답게 살아라”라는 보이지 않는 명령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너답게 살아라”, “자기만의 삶을 살아라”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언뜻 보면 이 말은 자유를 응원하는 따뜻한 조언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들뢰즈적 시선으로 보면 이 문장은 매우 강력한 명령형 문장입니다. 사회는 사람에게 “너답게 살지 않으면 실패한 인생”이라는 메시지를 은밀하게 전달합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이 진짜 자기다운 것인지 명확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도 이 명령을 계속해서 듣게 된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나는 지금 충분히 나답게 살고 있는가”라고 질문하고, 그 질문에 만족스럽게 답하지 못할 때 자책에 빠집니다. 들뢰즈는 이런 상황을 “자유의 언어로 작동하는 새로운 통제”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줍니다. 사람은 더 이상 외부의 검열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내면화된 기준이 스스로를 주기적으로 심판합니다.
들뢰즈 철학은 이 지점에서 자유를 다시 정의합니다. 들뢰즈에게 자유는 이미 완성된 ‘나다운 것’을 찾아내는 과정이 아니라, 아직 정해지지 않은 자기 자신을 향해 열려 있는 운동입니다. 들뢰즈의 언어로 말하면, 사람은 이미 확정된 정체성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되기”의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진짜 자유는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문장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앞으로도 다양한 방식으로 달라질 수 있다”라는 믿음을 지키는 능력입니다.
2. 들뢰즈가 말하는 욕망과 진짜 자유의 조건
들뢰즈 철학에서 자유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욕망에 대한 관점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많은 전통적 사상은 욕망을 결핍으로 설명했습니다. 사람은 부족하기 때문에 욕망하고, 욕망은 결핍을 채우기 위해 움직인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들뢰즈는 욕망을 그런 식으로 보지 않습니다. 들뢰즈는 욕망을 “무언가를 생산하고 연결하는 힘”으로 이해합니다.
사람이 욕망을 결핍으로만 이해하면 자유는 결핍을 채울 자원이 있는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는가의 문제로 축소됩니다. 그러나 욕망을 생산으로 이해하면 자유는 훨씬 넓은 영역에서 다뤄집니다. 자유는 “무엇을 가지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만들고 연결하는가”로 측정됩니다. 이 관점에서 진짜 자유는 욕망이 스스로의 흐름을 만들 수 있는 환경, 그리고 그 흐름을 따라 다양한 존재와 접속할 수 있는 능력과 관련됩니다.
2-1. 결핍이 아닌 생산으로서의 욕망
들뢰즈에게 욕망은 단순히 어떤 대상에 대한 갈망이 아닙니다. 욕망은 이미 움직이고 있는 힘이며, 관계를 만들어 내는 동력입니다. 사람은 욕망하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배우고, 낯선 사람을 만나고, 익숙한 길을 벗어납니다. 욕망을 결핍으로만 보면 사람은 늘 “아직 부족한 존재”로 남습니다. 그러나 욕망을 생산으로 보면 사람은 이미 많은 것을 만들어 내는 존재가 됩니다.
욕망을 생산으로 이해하는 순간 자유의 기준도 바뀝니다. 사람은 더 많이 소비할 수 있을 때가 아니라, 더 다양하게 생산하고 연결할 수 있을 때 더 자유롭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산은 반드시 경제적 생산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우정을 생산하고, 새로운 언어를 생산하고, 다른 삶의 모습을 상상하는 이미지를 생산합니다. 들뢰즈적 자유는 이 생산의 능력을 보호하고 확장하는 환경이 갖춰질 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예를 들어 사람은 야근을 최소화하고, 안정적인 급여를 받으며, 휴가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을 때 어느 정도의 자유를 느낍니다. 그런데 동일한 조건에서도 어떤 사람은 매우 창조적으로 삶을 재구성하고, 또 다른 사람은 습관적으로 시간을 소비하면서 무력감을 느낍니다. 들뢰즈 관점에서 보면 두 사람의 차이는 욕망이 생산에 도달할 수 있는 경로의 차이입니다. 한 사람의 욕망은 새로운 시도와 배움을 향해 흐르고, 다른 한 사람의 욕망은 피로를 달래기 위한 반복적 소비에 머무릅니다.
2-2. 고정된 자아를 넘어서는 ‘되기’의 자유
들뢰즈 철학에서 특히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되기”입니다. 들뢰즈는 사람을 고정된 “존재”보다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되기”로 이해합니다. 사람은 인생 내내 하나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단계의 되기를 통과합니다. 사람은 학생이 되었다가, 직장인이 되었다가, 누군가의 부모가 되거나, 새로운 직업으로 이동하면서 계속 다른 존재가 되어 갑니다.
여기서 들뢰즈는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은 이 많은 변화 속에서 실제로 얼마나 “되기”를 경험하는가입니다. 사람은 직함과 역할을 바꾸었지만, 욕망의 패턴은 그대로인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은 안정된 직업을 얻었지만, 여전히 타인의 인정에 목숨을 걸고, 숫자로 평가되는 공간에서만 자신의 가치를 느낍니다. 이런 변화는 겉모습만 달라졌을 뿐, 되기라기보다는 위치 이동에 가깝습니다.
들뢰즈가 말하는 되기의 자유는 고정된 자아를 잠시 내려놓는 경험과 연결됩니다. 사람은 자신을 규정해 온 문장들, 예를 들어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이 정도 수준의 사람이다”라는 말을 잠시 의심해 볼 때 되기의 문을 엽니다. 사람은 그 틈에서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시도하고, 예상 밖의 관계를 맺고, 기존의 취향과 다른 것을 선택해 봅니다. 이런 작은 시도가 반복될 때 사람은 비로소 자신이 “다른 무엇이 되어 가는 중”이라는 감각을 얻습니다. 들뢰즈에게 진짜 자유는 이 되기의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3. 들뢰즈의 ‘탈영토화’로 읽는 일상 속 자유
들뢰즈 철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개념 중 하나가 “탈영토화”입니다. 이 단어는 처음 듣기에 다소 낯설지만, 일상에 적용하면 의외로 구체적인 그림이 나옵니다. “영토화”는 어떤 관계나 구조가 사람을 특정 위치에 고정시키는 과정을 뜻합니다. 반대로 “탈영토화”는 그 고정된 위치에서 벗어나 새로운 연결과 흐름을 만드는 움직임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삶에는 수많은 영토화 과정이 존재합니다. 직업, 학력, 성별, 나이, 소득, 거주지, 팔로워 수 등이 사람이 스스로를 이해하는 방식과 타인의 시선을 결정합니다. 사람은 이 기준을 통해 자신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어떤 것을 꿈꾸어도 되는지 가늠합니다. 들뢰즈적 자유는 이 기준들을 완전히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라, 기준이 삶을 완전히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태도에서 시작됩니다. 사람은 이미 놓여 있는 영토를 인식하고, 그 경계 일부를 조금씩 허무는 실천을 통해 탈영토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3-1. 회사와 조직에서의 들뢰즈식 탈주
회사와 조직은 현대인의 삶에서 가장 강력한 영토 중 하나입니다. 조직은 직급과 평가, 목표와 실적을 통해 사람의 욕망을 특정 방향으로 정렬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감정과 시간을 회사의 리듬에 맞추며, 점점 회사 바깥의 삶은 부록처럼 취급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에게 회사는 단순한 일터가 아니라 정체성의 중심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퇴사라는 선택은 단순한 직장 이동이 아니라 자기 이해의 전면 수정으로 느껴집니다.
들뢰즈식 탈영토화는 무조건 퇴사하라는 조언이 아닙니다. 들뢰즈적 자유는 한 사람의 삶이 하나의 영토에 완전히 흡수되지 않도록 다른 흐름을 확보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사람은 회사 안에서도 여러 수준의 탈영토화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모든 욕망과 자존감을 조직의 평가에만 걸지 않는 방식으로 일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조직이 요구하지 않는 관심사를 키우고,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느슨한 연결을 만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은 업무와 직접적 관련이 없더라도, 자신의 호기심이 향하는 주제를 공부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작은 사이드 프로젝트를 시작하거나, 직무 바깥의 커뮤니티에 몸을 담그며 새로운 관계망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이런 움직임은 당장 눈에 띄는 성과를 가져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들뢰즈적 관점에서 보면 이런 움직임이 바로 자유를 향한 탈영토화의 초기 징후입니다. 사람은 더 이상 하나의 영토에만 속한 존재가 아니라 여러 흐름에 동시에 접속하는 존재가 됩니다.
3-2. 관계와 사랑에서의 들뢰즈적 자유
사람은 관계 속에서도 쉽게 영토화됩니다. 연애와 결혼, 가족 관계는 사람에게 소속감을 주는 동시에, 자유를 제한하는 규칙과 기대를 함께 제공합니다. 사람들은 “좋은 관계”라는 이상적인 모델을 머릿속에 그려 놓고, 그 모델에 현재의 관계를 끊임없이 맞춰 보며 불안을 느낍니다. 이 과정에서 사람은 상대를 있는 그대로 만나는 대신, 자신의 불안을 줄여 줄 역할로만 바라보기 쉽습니다.
들뢰즈적 자유는 관계를 소유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는 태도와 연결됩니다. 사람은 상대를 “내 사람”으로 완전히 확보하고 통제할 수 있을 때 안심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런 소유의 욕구는 시간과 함께 상대를 하나의 물건처럼 대하도록 만들고, 관계를 고정된 형태로 얼어붙게 합니다. 들뢰즈는 자유로운 관계를 서로가 서로의 되기를 도와주는 장으로 상상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 지금의 나로만 머무르지 않고, 상대와 함께 다른 나로 되어 가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모든 규칙을 거부하라”가 아니라 “우리만의 리듬을 함께 찾자”라는 방향입니다. 사람은 일반적인 연애 매뉴얼이나 결혼의 표준 모델을 그대로 복사하는 대신, 두 사람이 가진 욕망과 리듬에 맞는 관계 방식을 실험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은 서로의 일과를 하나의 시간표에 완전히 합치려 하기보다, 각자가 몰입하는 시간과 함께 쉬는 시간을 분리해서 설계할 수 있습니다. 들뢰즈적 자유는 관계를 끊지 않으면서도 관계의 형식을 창조적으로 바꾸는 능력을 지지합니다.
3-3. 디지털 시대, 알고리즘을 가르는 자유
디지털 환경과 알고리즘은 현대인의 새로운 영토입니다. 사람은 스마트폰 화면 속에서 정보, 관계, 소비, 여가를 동시에 경험합니다. 알고리즘은 사람의 취향과 행동을 분석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더 정교한 추천을 제공합니다. 사람은 점점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 비슷한 취향의 콘텐츠만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 현상은 편안함을 주지만, 동시에 다른 가능성을 볼 기회를 줄입니다.
들뢰즈적 관점에서 알고리즘은 사람의 욕망을 특정한 경로로 묶어 두는 강력한 영토화 장치입니다. 사람은 알고리즘이 보여주는 세계를 자신의 선택 결과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이미 필터링 된 세계 안에서만 움직이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는 더 많은 콘텐츠를 소비하는 능력이 아니라, 알고리즘이 그어 놓은 경계를 인식하고 가로질러 볼 수 있는 능력과 관련됩니다.
사람은 간단한 실천으로도 디지털 탈영토화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평소에 보지 않던 주제의 채널을 의도적으로 구독하거나, 알고리즘이 추천하지 않은 책을 고르는 습관을 들일 수 있습니다. 사람은 검색 창에 익숙한 키워드 대신, 자신이 잘 모르는 분야의 단어를 입력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작은 시도들은 들뢰즈적 의미에서 새로운 접속을 여는 행위이며, 진짜 자유를 향한 실험입니다.
4. 진짜 자유를 향한 들뢰즈식 실천 전략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면, 들뢰즈에게 진짜 자유는 고정된 자아가 모든 제약에서 벗어난 상태가 아닙니다. 진짜 자유는 욕망이 다양한 흐름과 접속할 수 있는 상태이며, 자신이 놓여 있는 영토를 인식하고 그 경계를 부분적으로 이동시키는 능력입니다. 이제 사람은 이 추상적인 설명을 일상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지 고려해야 합니다.
들뢰즈 철학은 실천에 대해 직접적인 사용 설명서를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들뢰즈의 개념을 삶에 가져오면 몇 가지 구체적인 전략을 뽑아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삶을 하나의 나무처럼 위계적으로 설계하는 대신, 리좀처럼 여러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지도로 그릴 수 있습니다. 사람은 거창한 인생 계획을 세우기보다, 작은 실험과 되기를 반복하는 루틴을 만들 수 있습니다.
4-1. 삶의 지도를 다시 그리는 리좀적 사고
들뢰즈는 삶을 설명할 때 나무와 리좀이라는 두 가지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나무는 뿌리와 줄기, 가지라는 분명한 중심과 위계를 가진 구조입니다. 많은 인생 설계가 이 나무의 이미지를 따릅니다. 사람은 좋은 학교를 뿌리, 안정된 직장을 줄기, 승진과 성공을 가지로 상상합니다. 이 구조에서는 중간에 크게 벗어나는 선택을 하기 어렵습니다. 한 번 잘못된 가지를 선택하면, 나무 전체가 망가지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리좀은 땅속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뿌리줄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리좀은 중심이 없고, 어느 지점에서든 새로운 가지가 나올 수 있습니다. 들뢰즈는 삶을 리좀처럼 설계할 때 자유가 확장된다고 말할 수 있는 관점을 제안합니다. 사람은 인생의 정답을 하나의 직선으로 상상하는 대신, 여러 개의 선과 점들이 얽혀 있는 지도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지도에서는 실패가 단절이 아니라 방향 전환에 가깝습니다.
실질적으로 사람은 자신의 삶을 리좀처럼 재구성하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사람은 “내 인생의 중심 프로젝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 대신, “지금 동시에 진행 중인 서로 다른 선들은 무엇인가”라고 묻습니다. 사람은 일, 관계, 취미, 공부, 몸의 경험, 지역 커뮤니티 활동 등 여러 선을 나열하고, 각 선이 어느 정도의 에너지를 받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사람은 특정 선이 지나치게 비대해지고, 다른 선이 말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리좀적 사고는 사람에게 완벽한 균형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리좀적 사고는 특정 시기에 어떤 선이 더 중요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받아들입니다. 다만 리좀적 사고는 삶의 전체 구성이 한 가지 선에 의해 완전히 잠식되는 순간을 경계합니다. 사람은 이 경계감을 통해 자신의 자유를 보호합니다. 사람은 스스로에게 “지금의 나는 몇 개의 선 위에서 동시에 살아가고 있는가”라고 묻는 것만으로도, 들뢰즈적 자유를 향한 중요한 한 걸음을 내딛습니다.
4-2. 작은 실험들을 쌓아가는 자유의 루틴
들뢰즈식 자유는 거대한 결단보다 작은 실험을 중시합니다. 사람은 통장 잔고, 나이, 책임 때문에 인생을 통째로 바꾸는 선택을 쉽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들뢰즈적 실천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거대한 결정을 내리지 않아도, 지금 이 자리에서 되기와 탈영토화를 향한 작은 실험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일상 루틴에 “실험의 시간”을 조금씩 추가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은 일주일에 한 번, 평소라면 절대 고르지 않았을 선택을 일부러 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늘 보던 장르의 콘텐츠 대신 낯선 분야의 콘텐츠를 선택하거나, 늘 가던 길 대신 새로운 길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작은 글을 쓰거나, 짧은 메모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다른 언어로 표현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행동은 겉으로 보기에는 사소하지만, 들뢰즈적 관점에서는 자아의 경계를 조금씩 움직이는 되기의 연습입니다.
사람은 또한 자신의 욕망을 기록하는 루틴을 만들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하루를 마무리하며 “오늘 나는 무엇을 진심으로 원했는가”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질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한두 문장으로 적어 보며, 욕망의 흐름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관찰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은 자신의 욕망이 타인의 기대를 대신 수행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실제로 자신만의 생기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는지 더 잘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 구분 능력이야말로 들뢰즈가 말하는 진짜 자유의 핵심 요소 중 하나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은 “실험의 실패”를 바라보는 태도를 바꿀 수 있습니다. 들뢰즈식 자유는 실패를 결과의 문제가 아니라 흐름의 문제로 봅니다. 사람은 실험이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을 때, “역시 나는 안 된다”라는 결론 대신 “이번에는 어떤 흐름이 막혔는가”를 분석할 수 있습니다. 이런 태도는 사람의 자존감을 보호할 뿐 아니라, 다음 실험을 준비하는 힘을 줍니다. 사람은 실패를 통해 자신이 뻗어나갈 수 없는 방향뿐 아니라, 여전히 열려 있는 다른 방향을 함께 확인합니다.
들뢰즈가 비추는 자유의 새로운 얼굴
지금까지 이 글은 들뢰즈 철학을 통해 ‘진짜 자유’가 무엇인지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았습니다. 현대 사회는 자유를 선택의 다량화, 자아실현, 자기관리의 언어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들뢰즈적 관점은 이러한 자유의 이미지를 낯설게 만들고, 자유를 욕망, 되기, 탈영토화, 리좀이라는 개념과 연결하여 새롭게 재구성합니다.
들뢰즈에게 진짜 자유는 단순히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진짜 자유는 욕망이 특정한 영토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흐름과 접속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진짜 자유는 이미 완성된 자아를 확인하는 과정이 아니라, 아직 도착하지 않은 여러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열어 두는 능력입니다. 사람은 이 자유를 통해 실패를 두려움이 아니라 방향 전환으로 받아들이고, 삶을 나무가 아닌 리좀의 이미지로 다시 그릴 수 있습니다.
들뢰즈 철학은 현실의 조건을 무시하는 이상주의를 제안하지 않습니다. 들뢰즈 철학은 오히려 사람이 처한 조건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그 조건 안에서 어떤 선들이 열려 있는지, 어떤 경계가 이동 가능할지를 묻습니다. 진짜 자유는 모든 제약이 사라진 후에 오는 것이 아니라, 제약 한가운데에서 다른 흐름을 찾아내고 키워 내는 과정에서 태어납니다. 사람은 이 자유를 통해 삶의 속도를 재조정하고, 관계의 형식을 새롭게 설계하고, 알고리즘이 제공하는 세계 바깥을 향해 작은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습니다.
“들뢰즈 철학으로 해석하는 진짜 자유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 글은 하나의 잠정적 답을 제시했습니다. 진짜 자유는 “내 마음대로 하는 삶”이 아니라 “나와 세계가 서로를 새롭게 만들 수 있는 삶”입니다. 이 정의는 완성된 결론이 아니라, 앞으로 독자가 자신의 삶에서 계속 수정해 나갈 수 있는 임시 정의입니다. 들뢰즈식 표현을 빌리면, 자유는 하나의 개념이라기보다 여전히 진행 중인 되기의 이름입니다.
일상에서 시작하는 들뢰즈식 자유 연습
이제 사람은 질문을 바꿀 수 있습니다. 사람은 “언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라고 묻는 대신, “오늘 하루를 들뢰즈식 자유에 조금 더 가깝게 만드는 한 걸음은 무엇일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은 사람을 거대한 결심의 부담에서 벗어나게 하고, 일상에 작게 심을 수 있는 자유의 실천을 보이게 합니다.
사람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들뢰즈식 자유 연습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 사람은 자신의 삶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고정된 문장을 하나 선택하고, 그 문장을 잠시 내려놓는 연습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숫자에 약한 사람이다”라는 문장을 “나는 아직 숫자와 친해지는 중이다”로 바꿔 볼 수 있습니다. 이 작은 언어 변화는 되기의 가능성을 엽니다.
- 사람은 일주일에 한 번 “영토 바깥 시간”을 정해, 평소의 루틴에서 벗어나는 활동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새로운 동네를 걸어 보거나, 관심 없는 분야의 강연을 들어 보거나, 알고리즘이 권하지 않은 책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 사람은 업무, 관계, 개인 시간을 포함한 자신의 일상을 간단한 그림이나 표로 그려 보고, 어떤 영역이 지나치게 커져 있는지, 어떤 영역이 거의 비어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작업은 삶의 리좀 지도를 만드는 첫 단계입니다.
- 사람은 매일 밤 “오늘 나의 욕망은 어디로 향했는가”라는 질문을 적어 두고, 일주일에 한 번 그 기록을 되돌아볼 수 있습니다. 이 기록은 타인의 기대를 수행하는 욕망과 자신의 생기를 향한 욕망을 구분하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들뢰즈 철학은 사람에게 완벽한 자유의 상태를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들뢰즈 철학은 사람에게 하나의 중요한 약속을 건넵니다. 사람의 삶에는 언제나 다른 가능성을 향한 미세한 틈이 존재하며, 사람은 그 틈을 발견하고 넓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약속입니다. 사람은 철학 책을 모두 이해하지 않아도,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의 욕망과 삶의 지도를 다시 그려 보는 것으로 들뢰즈식 자유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이 독자에게 “진짜 자유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조금 더 풍부하고 세밀하게 던질 수 있는 언어를 제공했다면, 이미 들뢰즈식 자유의 첫 번째 되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사람은 앞으로도 수많은 되기를 통과할 것이며, 그때마다 다른 방식으로 자유를 새로 정의하게 될 것입니다. 그 과정 자체가 바로 들뢰즈가 말하는 삶의 창조적 운동이며, 우리가 찾고 있던 진짜 자유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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