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 개요 – 들뢰즈 리좀 개념과 수직 문화의 충돌
- 서론 – 들뢰즈 철학으로 읽는 수직 문화의 흔들림
- 본론 – 들뢰즈 리좀 개념으로 보는 수직 문화 해체의 과정
- 결론 – 들뢰즈 리좀 개념으로 재구성하는 권위와 자유
- 마무리 – 들뢰즈가 말하는 ‘수직 이후’ 시대의 삶의 태도
들뢰즈 리좀 개념과 수직 문화의 충돌
들뢰즈 리좀 개념으로 바라본 ‘수직 문화’의 해체 현상
오늘날 사람은 예전처럼 하나의 위계와 하나의 기준만을 따르며 살지 않는다. 회사에서도 나이와 직급이 절대적인 힘을 잃어가고, 대중문화에서도 한 명의 거대한 스타가 모든 취향을 독점하지 못한다. 사람은 여러 커뮤니티에 동시에 속하고, 서로 다른 취향과 정체성을 겹겹이 겹쳐서 살아간다. 이런 현상을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수직 문화의 붕괴’, ‘위계적 구조의 약화’ 같은 말이다. 그런데 이 변화는 단순한 세대 갈등이나 예의의 해체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들뢰즈의 리좀 개념이 매우 의미 있게 등장한다.
들뢰즈가 말한 리좀은 위와 아래, 중심과 주변이 분명하게 나뉘는 ‘나무형 구조’와 정반대의 이미지를 가진다. 리좀은 뿌리줄기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어느 한 점을 시작점이나 꼭대기로 지정하기 어렵다. 사람은 리좀을 통해 세계를 수직이 아니라 수평적이고 다중적인 연결망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현대 사회에서 수직 문화가 약해지고, 수평적 네트워크가 강화되는 흐름은 들뢰즈 리좀 개념과 함께 읽을 때 더욱 선명해진다.
이 글에서 다루는 들뢰즈 리좀과 수직 문화의 주요 논점
이 글에서 필자는 들뢰즈 리좀 개념을 중심으로, ‘수직 문화’가 약해지는 시대의 구조 변화를 천천히 살펴볼 것이다. 개요에서는 문제의식을 정리하고, 서론에서는 수직 문화가 어떤 역사적 배경과 감정을 지니고 있었는지 간단히 돌아본다. 본론의 첫 부분에서는 들뢰즈 리좀 개념이 무엇인지, 왜 나무와 리좀이라는 두 이미지를 대비하며 설명했는지를 정리한다. 이어서 회사, 학교, 가족, 팬덤, 디지털 플랫폼 같은 구체적인 장면 속에서 수직 문화가 어떻게 흔들리고, 리좀적 연결이 어떻게 확장되는지 살펴본다.
결론과 마무리에서는 들뢰즈 리좀 개념이 수직 문화에 대한 단순한 ‘거부 선언’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할 것이다. 필자는 리좀적 구조가 자유와 창의성을 확장하는 동시에, 책임의 분산과 피로를 가져올 수 있다는 양면성을 함께 다루고자 한다. 이 글을 통해 사람은 들뢰즈 리좀 개념을 어렵게만 느끼기보다, 자신이 살아가는 구체적인 조직과 관계, 온라인 커뮤니티를 읽는 하나의 언어로 활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들뢰즈 철학으로 읽는 수직 문화의 흔들림
수직 문화가 사람에게 주었던 안정감과 억압
‘수직 문화’라는 말이 등장하면 많은 사람은 먼저 군대식 조직, 권위적인 상사, 연장자 중심의 회식 문화를 떠올린다. 수직 문화는 위에서 아래로 명령이 내려가고, 아래에서 위로 보고가 올라가는 구조를 기본으로 한다. 이런 구조는 불편하고 답답하게 느껴지지만, 동시에 어떤 사람에게는 나름의 안정감을 제공했다. 수직 문화에서는 누가 결정을 내리는지, 누가 책임을 지는지 비교적 분명했고, 사람은 정해진 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수직 문화는 언제나 억압의 감정과 함께 존재했다. 사람은 나이, 성별, 학벌, 직급에 따라 자신의 목소리가 다르게 취급되는 장면을 수없이 경험했다. 많은 조직에서 아래에 있는 사람은 창의성을 발휘하기보다, 윗사람의 눈치를 보며 말과 행동을 조절해야 했다. 수직 문화는 한편으로는 안정의 구조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감정의 위계, 말의 위계, 기회의 위계를 기계처럼 재생산하는 시스템이기도 했다. 들뢰즈 철학은 바로 이 수직적 사고가 얼마나 강력한 구조였는지, 그리고 그 구조가 어떤 방식으로 균열을 맞이하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들뢰즈 철학이 수직 문화 해체를 설명하는 데 적합한 이유
들뢰즈는 전통적인 철학이 너무 오랫동안 나무처럼 생각해 왔다고 비판했다. 나무형 사고는 뿌리와 줄기, 중심과 가지, 시작과 끝을 상정한다. 나무형 사고 속에서 진리는 하나의 중심에서 출발해 가지를 뻗고, 지식은 위계 구조를 타고 올라가며, 사회는 중심의 명령이 주변으로 퍼져 나가는 방식으로 이해된다. 수직 문화는 바로 이 나무형 사고의 사회적 표현이다. 이런 사고에서는 언제나 중심이 중요하고, 위가 아래보다 더 우월하다고 여겨진다.
들뢰즈는 이 나무형 사고를 대신할 이미지로 리좀을 제안했다. 리좀은 어느 한 곳이 중심이 아닌, 분산된 연결과 끊임없는 가지치기의 이미지다. 들뢰즈 리좀 개념은 수평적이고 다중적인 관계의 구조를 강조한다. 사람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수평적 네트워크, 수평적인 커뮤니케이션, 수평적 취향 공동체는 리좀 개념과 묘하게 겹친다. 이 때문에 들뢰즈 철학은 수직 문화 해체와 리좀적 구조의 확산을 설명하는 데 매우 적절한 도구가 된다.
들뢰즈 리좀 개념으로 보는 수직 문화 해체의 과정
들뢰즈 리좀 개념이란 무엇인가 – 나무가 아닌 뿌리줄기의 사고
들뢰즈가 비판한 ‘나무형 사고’의 특징
들뢰즈는 전통적인 서양 철학과 과학, 정치가 대부분 나무형 모델을 전제해 왔다고 지적했다. 나무형 모델에서 중요한 것은 뿌리와 줄기, 그리고 가장 위에 있는 꼭대기다. 뿌리는 기원과 근원을 상징하고, 줄기는 권력과 통일성을 상징하며, 꼭대기는 진리나 목적을 상징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지식은 위로 향하는 여정이 되고, 사람은 중심에 가까이 갈수록 ‘더 중요한 존재’로 간주된다. 수직 문화의 언어인 “라인을 탄다”, “윗선에 보고한다” 같은 표현은 나무형 사고의 일상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나무형 사고는 정리와 통제에 유리하지만, 차이와 변화를 포착하는 데 취약하다. 나무형 구조에서는 가지가 어느 정도 자라면 잘리고, 측면으로 뻗는 성장은 방해를 받는다. 들뢰즈는 이런 구조에서 벗어나, 중심 없이도 성장하고, 출발점을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방식의 사고를 찾고자 했다. 그때 들뢰즈가 끌어온 이미지가 바로 리좀이다.
들뢰즈 리좀의 핵심 이미지 – 어디서나 시작되고 어디로든 뻗어가는 구조
들뢰즈가 말한 리좀은 땅속을 가로질러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뿌리줄기이다. 리좀은 어느 한 점이 시작점이 아니고, 어느 한 부분이 전체를 대표하지 않는다. 리좀의 한 부분을 잘라내도 그 조각은 또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며 새로운 연결을 만든다. 들뢰즈 리좀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다.
- 중심이 아니라 연결이 중요하다.
- 위와 아래의 위계보다, 옆과 옆의 접속이 핵심이다.
- 하나의 기원 대신, 여러 시작점이 동시에 존재한다.
- 한 번 정해진 구조가 아니라, 계속해서 재배치되는 구조다.
이러한 리좀적 사고는 현대 사회의 여러 현상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게 한다. 회사 조직, 학교, 문화 산업, SNS, 팬덤, 취향 공동체 등은 더 이상 위계만으로 설명되지 않고, 복수의 연결과 교차 관계 속에서 이해된다. 들뢰즈 리좀 개념은 “수직 문화가 사라지고 있다”는 진단을 단순한 세대 문제를 넘어, 사고 방식의 전환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수직 문화의 구조 –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권위의 체계
수직 문화가 작동하던 방식 – ‘나무형 사회’의 일상
수직 문화는 사회 곳곳에서 나무형 구조로 표현된다. 회사에는 사장, 임원, 부장, 과장, 대리, 사원이라는 직급의 줄기가 있고, 학교에는 교장, 교감, 교사, 학생으로 이어지는 위계가 있다. 가족 안에서도 부모, 특히 아버지의 말이 집안의 규칙이 되는 구조가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이 구조 안에서 결정은 위에서 내려오고, 그 결정은 아래로 갈수록 의문 없이 실행되어야 한다고 여겨졌다.
수직 문화는 효율성과 속도 면에서는 장점이 있었다. 위에서 명령을 내리고 아래에서 수행하는 방식은 군대식 조직에서는 특히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이 구조는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차단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창의적인 의견이 위로 올라가는 통로는 좁았고, 다른 방식의 삶을 상상하는 시도는 종종 ‘튀는 행동’으로 간주되었다. 이런 수직 문화의 구조는 들뢰즈가 비판한 나무형 사고의 사회적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수직 문화가 만들어낸 감정 – 안전함, 두려움, 체념
수직 문화는 사람에게 특정한 감정의 패턴을 남겼다. 위쪽에 위치한 사람은 책임과 부담, 통제의 쾌감을 동시에 느꼈고, 아래에 있는 사람은 안전함과 체념, 분노와 초조함을 동시에 경험했다. 어떤 사람에게 수직 문화는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있어서 편한 구조”였지만, 또 다른 사람에게 수직 문화는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넘기 어려운 벽이 있는 구조”였다. 이런 감정은 단지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구조가 만들어낸 정서적 효과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 리좀 개념이 등장하는 순간, 사람은 이 감정들의 배경을 다르게 읽을 수 있게 된다. 리좀적 구조에서는 감정의 수직적 배치 대신, 감정의 수평적 공유가 강조된다. 수직 문화의 해체는 단순히 예의범절이나 상하 관계의 붕괴가 아니라, 감정을 배치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사건이다. 들뢰즈 철학은 바로 이 감정의 재배치를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들뢰즈 리좀과 네트워크 사회 – 수평적 연결의 확산
네트워크 구조와 리좀 – 위계 없는 연결의 확장
디지털 기술과 인터넷의 확산은 사회 구조를 ‘네트워크’라는 이미지로 설명하게 만들었다. 네트워크에서는 중심과 주변의 구분이 희미해지고, 얼마나 위쪽에 있느냐보다 얼마나 많이 연결되어 있느냐가 중요해진다. 이 네트워크 사회의 모습은 들뢰즈 리좀 개념과 매우 잘 맞는다. 리좀도 중심이 아니라 연결의 정도와 방향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은 여러 개의 계정, 그룹, 채팅방, 커뮤니티에 동시에 속한다. 사람은 직장에서는 한 위치에 있지만, 취미 공동체에서는 전혀 다른 위치를 가지기도 한다. 하나의 위계가 인생 전체를 규정했던 과거와 달리, 여러 네트워크가 겹쳐진 구조 속에서 사람의 정체성이 형성된다. 들뢰즈 리좀 개념을 떠올리면, 사람은 자신이 ‘한 그루 나무’의 가지가 아니라, 여러 리좀의 교차점에 서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리좀적 연결이 가져온 장점 – 정보, 기회, 연대의 확장
리좀적, 네트워크적 구조는 분명 긍정적인 측면을 지닌다. 사람은 예전보다 훨씬 빠르게 정보를 얻고, 다양한 관점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수직 문화에서는 위에서 내려오는 정보만 접하기 쉬웠지만, 리좀적 구조에서는 옆에서, 심지어 아래에서 올라오는 정보도 쉽게 얻게 된다. 신입사원이 올린 아이디어가 회사를 뒤흔들고, 무명 창작자의 작업이 단숨에 세계적 주목을 받는 일도 가능해졌다.
또한 리좀적 연결은 새로운 연대를 만들어낸다. 같은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직업, 나이, 지역을 넘어 서로 연결된다. 사회적 이슈, 환경 문제, 젠더 문제, 노동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네트워크를 만들고, 오프라인 행동으로 이어가는 경우도 많아졌다. 들뢰즈 리좀 개념으로 보면, 이러한 연대는 하나의 중심 조직이 지시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지점에서 자발적으로 생겨나는 접속들의 결과다.
조직·학교·가족에서 드러나는 수직 문화의 균열
회사 조직 – 직급 중심 구조에서 프로젝트 리좀으로
회사 조직을 보면 수직 문화의 균열이 특히 선명하다. 예전에는 직급이 거의 모든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지금은 프로젝트 단위로 조직이 재편되는 경우가 많다. 프로젝트 팀에서는 직급보다 역할과 전문성이 더 중요해진다. 이름도 ‘팀장’ 대신 ‘PM(프로젝트 매니저)’ 같은 표현이 쓰이고, 다양한 부서와 직급의 사람들이 한 팀으로 묶인다. 이때 권력은 위에서 아래로만 흐르지 않고, 프로젝트의 필요에 따라 유동적으로 이동한다.
들뢰즈 리좀 개념으로 보면, 이런 조직은 나무형 구조에서 리좀형 구조로 이동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조직도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실제로 일을 움직이는 것은 프로젝트 팀이라는 리좀적 연결망이다. 사람은 한 회사 안에서 여러 프로젝트를 거치면서 서로 다른 리좀에 접속하고, 그 접속의 경험을 통해 성장한다. 수직 문화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 리좀적 구조가 내부에서 끊임없이 그 구조를 흔들고 있다.
학교와 가족 – 절대 권위의 퇴조와 새로운 긴장
학교와 가족에서도 수직 문화의 균열은 이어진다. 교사는 더 이상 절대적인 지식의 원천이 아니고, 학생은 인터넷과 각종 콘텐츠를 통해 다양한 지식을 이미 가지고 교실에 들어온다. 학생은 수업 중에 교사보다 더 최신 정보를 알고 있을 때도 있고, 학교 밖 멘토나 온라인 강의를 통해 자신만의 학습 리좀을 만들어 가기도 한다. 이 상황에서 교사의 권위는 자연스럽게 재구성될 수밖에 없다.
가족 역시 리좀화되고 있다. 부모는 예전처럼 “내가 다 안다”라고 말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 자녀는 부모 세대가 경험하지 못한 디지털 환경과 글로벌 문화에 더 익숙하다. 이로 인해 갈등도 생기지만, 동시에 서로에게 배울 수 있는 여지도 생긴다. 들뢰즈 리좀 개념으로 보면, 가족은 한 사람의 권위가 중심에 있는 나무가 아니라, 세대와 세대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가면서도 곳곳에서 만나는 리좀적 구조에 가까워지고 있다.
디지털 플랫폼과 커뮤니티를 보는 들뢰즈 리좀적 시선
커뮤니티와 팬덤 – 수직적 팬 문화에서 리좀적 팬 문화로
과거의 팬 문화는 종종 수직 문화와 닮아 있었다. 스타는 높은 곳에 있고, 팬은 아래에서 응원하는 구조였다. 그러나 지금의 팬덤은 훨씬 리좀적이다. 팬은 단순 소비자가 아니라, 콘텐츠를 직접 생산하고, 서로를 교육하고,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낸다. 팬 커뮤니티 안에서는 공식 기획사보다 더 영향력 있는 팬 계정이 등장하기도 하고, 팬들끼리의 자발적인 프로젝트가 실제 제작사와 협업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들뢰즈 리좀 개념으로 보면, 팬덤은 수직적 스타 시스템 안에서 생겨난 또 다른 리좀적 구조이다. 공식 계정의 정보만이 아니라, 팬 계정, 번역 계정, 짤 생성 계정, 밈 계정이 서로 연결되면서 거대한 리좀을 형성한다. 이 리좀 안에서 사람은 서로를 가르치고, 규범을 만들고, 때로는 공식 기획사의 방향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수직 문화와 리좀 문화가 팽팽히 긴장을 이루는 장면이다.
플랫폼 알고리즘과 리좀 – 연결을 설계하는 ‘보이지 않는 손’
디지털 플랫폼 자체도 리좀적 구조처럼 보이지만, 그 내부에서는 또 다른 수직성이 작동한다. 플랫폼은 이용자들 사이의 수평적 연결을 가능하게 하지만, 어떤 연결이 더 많이 보이고, 어떤 연결이 덜 보이는지는 알고리즘이 결정한다. 들뢰즈 리좀 개념을 적용해 보면, 사람의 자발적인 리좀 위에 플랫폼이 설계한 또 다른 ‘인공 리좀’이 덧씌워져 있는 셈이다.
사람은 여러 커뮤니티에 참여하고 다양한 계정을 팔로우하지만, 실제로 보게 되는 정보는 알고리즘이 선별한 일부에 불과하다. 이 상황에서 사람의 리좀적 연결 욕구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연결의 경로는 플랫폼의 설계에 의해 제한되기도 한다. 들뢰즈적 관점에서 보면, 현대의 리좀은 완전히 자유로운 수평 구조라기보다, 플랫폼이라는 새로운 수직성 안에서 부분적으로 길들여진 구조다. 수직 문화는 사라지는 대신, 더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돌아오고 있다.
리좀적 삶의 가능성과 함정 – 들뢰즈 개념에 대한 오해 풀기
리좀을 ‘아무렇게나’ 사는 삶으로 오해할 때
들뢰즈 리좀 개념은 때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일부 사람은 리좀을 “규칙 없이, 계획 없이, 그냥 아무렇게나 흘러가는 삶”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들뢰즈 리좀은 무질서와 혼란을 찬양하는 개념이 아니다. 리좀에는 나름의 질서와 패턴이 존재한다. 다만 그 질서는 위에서 내려온 명령이나 하나의 중심이 강요한 것이 아니라, 여러 연결이 중첩된 결과로 형성된 것이다.
리좀적 삶은 “하고 싶은 대로만 사는 삶”이라기보다, “여러 접속을 시도하면서 자신에게 맞는 흐름을 찾아가는 삶”에 가깝다. 사람은 리좀적 구조 속에서 더 많은 자유를 경험하지만, 그 자유는 동시에 더 많은 선택과 더 많은 책임을 요구한다. 수직 문화가 제공하던 명료한 가이드라인이 사라진 자리에는 스스로 자기 구조를 설계해야 하는 부담이 남는다.
리좀적 구조가 만들어내는 피로 – 선택과 연결의 과잉
리좀적 연결은 풍부함과 동시에 피로를 가져온다. 사람은 너무 많은 커뮤니티에 참여하고, 너무 많은 관계를 유지하려 하다가, 어느 순간 극심한 소진을 경험하기도 한다. 수직 문화에서는 몇 개의 위계를 관리하면 되었지만, 리좀적 구조에서는 수많은 옆 연결을 관리해야 한다. 이때 사람은 관계의 깊이보다 ‘연결의 개수’를 의식하며, 자신이 충분히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불안을 느끼기도 한다.
들뢰즈 리좀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런 피로를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 리좀적 삶은 기존 수직 구조로 돌아가자는 반동적 욕망과, 모든 관계를 끊고 혼자가 되자는 탈주의 욕망 사이에서 흔들린다. 이 사이에서 사람은 자신에게 필요한 연결과 그렇지 않은 연결을 구분하는 감각을 조금씩 길러야 한다. 들뢰즈가 말한 리좀적 사고는 결국, 연결을 무한 확장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연결의 방식을 스스로 비판적으로 되묻는 감수성을 요구한다.
들뢰즈 리좀 개념으로 재구성하는 권위와 자유
수직 문화 이후, 권위는 어떻게 다시 등장하는가
지금까지 이 글은 들뢰즈 리좀 개념을 활용해 수직 문화의 구조와 그 해체 과정을 살펴보았다. 수직 문화는 분명 약해지고 있지만, 권위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권위는 형태를 바꾸어 다시 나타난다. 회사에서는 직급 대신 역량과 성과가 새로운 권위가 되고, 온라인에서는 팔로워 수와 영향력이 새로운 위계를 만든다. 공식 기관보다 인플루언서의 말이 더 무게를 갖는 장면도 많다.
들뢰즈 리좀 개념은 이 새로운 권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리좀적 구조에서는 권위도 네트워크의 한 지점으로 존재한다. 권위는 더 이상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연결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사람은 누군가를 팔로우하고, 그의 말에 반응하고, 그를 중심으로 새로운 리좀을 만들어 간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중심들이 계속 생성된다. 수직 문화 이후의 시대는 “중심이 없는 시대”가 아니라 “여러 중심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사라지는 시대”라고 볼 수 있다.
들뢰즈 리좀 개념이 제안하는 자유의 재정의
수직 문화의 해체는 사람에게 자유를 약속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의 자유는 훨씬 복잡한 경험으로 다가온다. 들뢰즈 리좀 개념은 자유를 “어떤 구조에도 속하지 않는 상태”로 이해하지 않는다. 자유는 오히려 “어떤 구조에 속할지, 어떻게 속할지, 언제 구조를 변형할지 선택할 수 있는 능력”에 가깝다. 사람은 완전히 구조 밖으로 나갈 수 없지만, 여러 구조 사이를 가로지르며 자신의 리좀을 조형할 수 있다.
들뢰즈 철학의 언어로 말하자면, 자유는 하나의 큰 탈출이 아니라, 많은 작은 탈주선들의 조합이다. 회사 안에서, 가족 안에서, 온라인 커뮤니티 안에서, 사람은 자신이 너무 깊이 굳어져 있는 지점을 발견할 때마다 작은 변형을 시도할 수 있다. 그 작은 변형들이 모여 새로운 리좀을 형성한다. 수직 문화 이후의 자유는 바로 그런 누적된 미세 조정 속에서 만들어진다.
들뢰즈가 말하는 ‘수직 이후’ 시대의 삶의 태도
오늘의 사람에게 들뢰즈 리좀 개념이 던지는 질문
들뢰즈 리좀 개념은 결국 사람에게 한 가지 태도를 제안한다. 그 태도는 “지금 내가 서 있는 구조를 당연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은 회사 조직도를, 가정의 역할 분담을, 학교의 규칙을, 플랫폼의 알고리즘을 너무 익숙하게 받아들이며 산다. 그러나 들뢰즈 리좀 개념을 떠올리면, 사람은 이런 구조들이 하나의 선택된 배치일 뿐, 유일한 방식은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사람은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나는 왜 이 위계를 당연하다고 느끼는가?”, “나는 어떤 연결을 스스로 만들었고, 어떤 연결은 나도 모르게 주어진 것인가?”, “이 구조가 나의 욕망과 가능성을 어떻게 제한하거나 확장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은 사람에게 당장 구조를 부수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 속한 구조를 낯설게 바라보고, 작은 균열을 내보도록 초대한다.
리좀적 삶을 향한 작은 실천 – 연결을 선택하고, 구조를 시험해 보기
수직 문화가 점점 약해지는 시대에 사람은 리좀적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이 리좀적 구조를 조금이라도 더 의식적으로 다루는 일이다. 사람은 불필요한 연결을 줄이고, 의미 있는 연결을 강화하는 선택을 통해 자신만의 리좀을 조정할 수 있다. 한 직장, 한 관계, 한 플랫폼에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묶어두기보다, 여러 리좀에 적절히 분산시키는 전략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사람은 자신이 속한 조직 안에서 수직 구조를 조금씩 리좀화하는 실험을 할 수 있다. 회의 방식, 소통 방식, 정보 공유 방식을 바꾸는 작은 시도들이 그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들뢰즈가 강조하듯, 거대한 혁명은 언제나 작은 실천과 실험의 누적에서 비롯된다. 이 작은 실험들은 수직 문화가 지배하던 시대에서, 리좀적 구조가 점점 힘을 얻어 가는 시대를 향해 나아가는 조용한 움직임이다.
들뢰즈의 리좀 개념은 이론서 속에만 머무르는 철학이 아니라, 오늘 사람의 마음과 일상, 조직과 관계를 다시 설계해 볼 수 있는 하나의 도구다. 사람은 이 개념을 거창하게 이해할 필요 없이, 지금 자신이 맺고 있는 연결들을 잠시 바라보는 일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그 순간, ‘수직 문화’가 사라지는 시대의 구조 해체는 더 이상 두려운 붕괴가 아니라, 새로운 연결과 삶의 방식이 태어나는 과정으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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