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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들뢰즈 & 현대 사유

질 들뢰즈가 말한 ‘탈주선’이란? 얽힘에서 벗어나는 철학적 방법

by 둥둥팍 2025. 12. 7.

 

격자 구조를 뚫고 나가는 추상적 선의 이미지

 

이 글은 질 들뢰즈가 말한 ‘탈주선’ 개념을 중심으로, 현대인이 겪는 여러 얽힘에서 벗어나는 철학적 방법을 소개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사람은 일과 관계, 도시와 디지털 환경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특정한 패턴에 묶여 살아갑니다. 사람은 가끔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지?”, “이렇게 사는 방식 말고 다른 길은 없을까?”라는 질문을 떠올립니다. 들뢰즈의 탈주선 개념은 바로 이런 질문이 출발하는 지점에서 의미를 갖습니다.

질 들뢰즈는 세상을 고정된 구조가 아니라 끊임없이 흐르고 변하는 선들의 집합으로 바라봤습니다. 들뢰즈 철학에서 탈주선은 지금까지 자신을 묶어 두던 구조와 관계의 패턴에서 벗어나, 다른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선을 가리킵니다. 이 선은 눈에 보이는 탈출구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새로 긋는 실천입니다. 이 글은 독자가 탈주선을 추상적인 철학 용어로만 이해하지 않고, 자신의 일상과 연결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초점을 둡니다.

글의 구성은 개요, 서론, 본론, 결론, 마무리의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집니다. 본론에서는 먼저 들뢰즈 철학에서 탈주선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펴보고, 단순한 현실도피와 어떻게 다른지 구분합니다. 이어서 회사, 관계, 도시와 디지털 환경 속에서 탈주선이 어떻게 그려질 수 있는지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설명합니다. 마지막으로 들뢰즈의 관점을 참고하여, 독자가 실제로 시도할 수 있는 탈주선 실천 전략과 함께 주의해야 할 점을 제안합니다.

들뢰즈 철학과 탈주선, 왜 지금 다시 꺼내야 할까

현대 사회에서 사람은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선택지를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은 여러 일을 동시에 할 수 있고, 다른 도시로 이동할 수도 있으며, 온라인에서 전혀 새로운 정체성으로 활동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정반대의 감정이 자주 나타납니다. 사람은 여전히 “벗어나고 싶다”, “도망가고 싶다”라는 말을 내뱉습니다. 사람은 일에서, 관계에서, 스스로 만든 기대에서 벗어나고 싶어합니다.

이 모순적인 감정은 단순한 나약함 때문이 아닙니다. 사회는 끊임없이 효율성과 성과를 요구하며, 사람의 삶을 숫자로 평가하고 서열화합니다. 사람은 겉으로는 자유로운 선택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기준과 규칙에 맞춰 자신을 조정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스스로에게 “지금 이 방식 말고 다른 삶은 없을까?”라고 묻지만, 막상 그 질문에 대답할 언어와 방향을 찾지 못합니다.

질 들뢰즈의 탈주선 개념은 바로 이 지점에서 힘을 발휘합니다. 들뢰즈 철학은 사람에게 단순히 “지금 있는 곳에서 빠져나와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들뢰즈는 사람이 놓여 있는 구조와 욕망의 패턴을 세밀하게 분석한 뒤, 그 안에서 “다른 선”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질문합니다. 이때 탈주선은 무모한 탈출이 아니라, 새로운 연결과 변화를 향한 창조적 움직임입니다.

사람은 탈주선이라는 말을 들으면 종종 “완전히 떠나는 것”, “모든 관계를 끊고 사라지는 것”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들뢰즈는 탈주선을 그런 식의 도망과 구분합니다. 들뢰즈에게 탈주선은 도망치는 선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여는 실험의 선입니다. 이 글은 독자가 이 개념을 이해하고, 자신의 삶에서 작고 구체적인 탈주선을 그려 볼 수 있도록 안내하는 데 목적을 둡니다.

들뢰즈가 말한 탈주선, 개념에서 실천까지

1. 들뢰즈 철학에서 보는 탈주선의 기본 의미

들뢰즈 철학에서 탈주선을 이해하기 위해 사람은 먼저 ‘선’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들뢰즈는 사람과 사회, 욕망과 권력의 관계를 설명할 때 선(line)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습니다. 사람은 특정한 삶의 패턴을 따라 움직이며, 그 패턴은 일종의 선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어떤 선은 안정적이고, 어떤 선은 긴장 상태이며, 또 어떤 선은 갑자기 방향을 틀며 새로운 길을 엽니다.

탈주선은 이 선들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선입니다. 탈주선은 기존의 구조와 규칙이 허용하던 경로를 벗어나,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을 의미합니다. 들뢰즈에게 탈주선은 단순히 물리적인 이동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탈주선은 생각의 방식, 관계를 맺는 습관, 욕망을 사용하는 방식이 변할 때 그려지는 보이지 않는 선입니다. 사람은 같은 자리에 있어도, 같은 일을 계속해도, 마음과 욕망의 사용법이 바뀌면 새로운 탈주선을 그릴 수 있습니다.

1-1. 들뢰즈가 말한 ‘선(line)’과 ‘탈주’의 결합

들뢰즈가 사용하는 ‘선’이라는 이미지는 사람의 삶이 단단한 구조물이라기보다 유동적인 궤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사람은 정적인 점이 아니라, 언제나 움직이는 선으로 살아갑니다. 사람의 습관, 관계, 생각, 직업, 취향이 모두 하나의 선처럼 이어집니다. 이 선은 결코 하나가 아닙니다. 사람은 동시에 여러 개의 선 위에서 살아갑니다. 회사에서의 선, 가족 안에서의 선, 온라인에서의 선이 서로 교차합니다.

여기서 ‘탈주’라는 말이 더해질 때, 선은 갑자기 다른 성격을 띱니다. 탈주는 단순히 ‘도망간다’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탈주는 길들여진 패턴에서 벗어나 다른 움직임을 시도하는 모험입니다. 들뢰즈에게 탈주선은 이 모험이 실제로 그림으로 나타난 상태입니다. 사람은 자신을 둘러싼 규칙과 기대에만 반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규칙의 틈새를 찾아 새로운 길을 만드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탈주선은 바로 그 틈새에서 시작됩니다.

들뢰즈 철학에서 중요한 점은, 탈주선이 항상 외부로의 이동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도시를 떠나지 않아도, 회사를 당장 그만두지 않아도, 관계를 완전히 끊지 않아도 탈주선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탈주선은 물리적 이동보다 욕망과 시선의 이동에 더 가깝습니다. 사람은 익숙한 공간을 새로운 눈으로 볼 때, 거기서 이미 작은 탈주선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1-2. 고정된 정체성에서 흐름으로: 탈주선의 방향

들뢰즈 철학은 고정된 정체성을 의심합니다. 사람은 스스로를 설명할 때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문장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러나 들뢰즈는 이런 문장이 사람을 하나의 틀에 가두는 효과를 낸다고 보았습니다. 사람은 실제로는 끊임없이 변하는 존재이며, 여러 가지 되기의 과정을 통과합니다. 탈주선은 바로 이 되기의 방향을 보여 줍니다.

탈주선은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는 문장을 잠시 멈추게 합니다. 사람은 탈주선을 따라가면서 “나는 이런 사람일 수도 있다”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경험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은 늘 조용하고 수동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어느 순간 작은 모임을 기획하거나 낯선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어 봅니다. 이 행위는 단순한 성격 변화가 아니라, 자신이 그려 왔던 정체성의 선에서 벗어나 새로운 되기를 향해 나아가는 탈주선입니다.

탈주선의 방향은 항상 미래를 향해 열려 있습니다. 탈주선은 과거로 도망가는 선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어떤 것과 접속하려는 선입니다. 사람은 이 선을 따라가면서, 자신의 삶이 이미 알고 있던 답을 반복하는 대신, 아직 말해 보지 않은 문장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들뢰즈에게 탈주선은 그 자체로 하나의 창조 행위입니다.

2. 들뢰즈의 탈주선과 단순한 도피의 차이

사람은 종종 탈주선을 현실도피와 혼동합니다. 들뢰즈 철학을 처음 접하는 사람은 “결국 다 때려치우고 떠나라는 이야기인가?”라고 질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들뢰즈가 말한 탈주선은 그런 단순한 도망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갖습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사람은 탈주선이라는 이름으로 자기파괴적인 선택을 정당화할 위험도 있습니다.

2-1. 현실도피와 들뢰즈식 탈주의 결정적 차이

현실도피는 대체로 책임과 불편한 감정을 피하기 위해 현실 감각을 흐리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사람은 현실이 주는 압박을 견디기 힘들 때, 자신의 감각을 둔하게 만드는 선택을 합니다. 과도한 소비, 끝없는 콘텐츠 시청, 무의미한 반복적인 활동이 여기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사람의 삶은 잠시 고통에서 멀어질 수 있지만, 새로운 가능성은 거의 열리지 않습니다.

반대로 들뢰즈의 탈주선은 감각을 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민하게 만듭니다. 탈주선은 현실을 부정하는 선이 아니라, 현실을 다른 각도에서 다시 보게 하는 선입니다. 사람은 탈주선을 통해 자신을 묶어 두던 구조를 더 정확히 인식하고, 그 구조에서 어떤 부분을 바꿀 수 있는지 탐색합니다. 그래서 탈주선은 현실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재구성하는 움직임입니다.

사람이 들뢰즈식 탈주선을 따르고 있는지, 단순한 현실도피에 빠져 있는지 구분하는 간단한 기준이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이 선택이 나를 더 예민하게 만들고, 더 넓은 세계에 접속하게 하는가, 아니면 잠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게 만드는가?” 전자에 가까울수록 그 선택은 탈주선에 가깝고, 후자에 가까울수록 단순한 도피에 가깝습니다.

2-2. 들뢰즈가 경계한 ‘파괴적인 탈주선’

들뢰즈는 탈주선을 긍정적으로 말하지만, 동시에 파괴적인 탈주선의 위험도 함께 언급했습니다. 어떤 탈주선은 삶을 더 풍부하게 만들기보다, 사람을 쇠약하게 만들고 주변까지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완전히 무시하며 무리한 선택을 할 때, 혹은 타인의 삶을 고려하지 않고 모든 관계를 끊어 버릴 때 이런 파괴적인 탈주선을 그릴 수 있습니다.

파괴적인 탈주선은 보통 속도만 빠르고 방향은 불분명합니다. 사람은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라는 압박 속에서 자신을 몰아붙이고, 충분한 준비와 연결 없이 삶을 뒤집어엎으려 합니다. 이런 움직임은 처음에는 해방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얽힘과 의존을 만들어 냅니다. 들뢰즈가 말한 건강한 탈주선은 속도보다 방향과 연결 상태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람이 탈주선을 그리면서도 자신과 타인의 삶을 함께 고려할 수 있을 때, 그 탈주선은 창조적인 힘을 갖습니다. 들뢰즈 철학은 사람에게 “모든 것을 부수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들뢰즈 철학은 오히려 “무엇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새로운 연결을 만들 수 있는지 생각하라”라고 요청합니다. 이 태도가 현실도피와 파괴적 탈주선을 구분하는 핵심 기준입니다.

3. 들뢰즈의 탈주선으로 읽는 일상의 얽힘들

이제 사람은 들뢰즈의 탈주선 개념을 일상에 대입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삶에는 눈에 보이는 얽힘과 보이지 않는 얽힘이 함께 존재합니다. 회사의 구조, 관계의 패턴, 도시의 리듬, 디지털 알고리즘이 사람을 특정한 삶의 방식에 묶어 둡니다. 탈주선은 이 얽힘을 무시하거나 완전히 버리는 것이 아니라, 얽힘의 구조를 이해한 뒤 그 안에서 다른 길을 만드는 실천입니다.

3-1. 회사와 커리어에서 그리는 탈주선

현대인에게 회사와 커리어는 가장 강력한 영토입니다. 사람은 회사의 평가 기준과 조직 문화에 맞추어 자신의 시간을 배치합니다. 사람의 욕망은 실적과 보상, 승진과 안정이라는 언어로 재구성됩니다.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가치와 가능성을 오직 직무와 직함으로만 측정합니다. 이때 탈주선의 필요성이 생깁니다.

들뢰즈식 탈주선은 무작정 퇴사를 권유하지 않습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퇴사가 중요한 탈주선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탈주선은 그보다 더 미세한 수준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회사라는 영토 안에서도 다른 선을 그릴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역량을 하나의 직무에만 묶어 두지 않고, 옆으로 확장하는 실험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관심 있는 분야의 프로젝트를 자발적으로 제안하거나, 사내외 커뮤니티를 통해 새로운 연결을 만들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어느 회사의 누구”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가치를 만드는 사람”으로 재정의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재정의는 당장 명함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설명하는 문장을 바꾸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런 언어의 전환은 들뢰즈적 의미에서 탈주선의 출발점입니다. 사람은 이 문장 속에서 자신이 앞으로 이동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선을 발견하게 됩니다.

3-2. 관계와 감정의 패턴에서 발견하는 탈주선

사람은 관계 속에서도 쉽게 동일한 패턴을 반복합니다. 사람은 비슷한 방식으로 서운함을 느끼고, 비슷한 지점에서 상처를 주고받으며, 비슷한 이유로 관계를 포기합니다. 이런 패턴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굳어져서, 새로운 관계에서도 과거의 기억을 그대로 다시 재생합니다. 들뢰즈의 탈주선은 이런 반복되는 감정 패턴 안에서도 작은 틈을 찾으라고 말합니다.

관계에서의 탈주선은 상대를 바꾸는 것에서만 시작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먼저 자신의 반응을 관찰하는 일에서 출발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특정한 상황에서 자동으로 튀어나오는 말과 행동을 기록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이 상황이 오면 나는 항상 이렇게 반응한다”라는 패턴을 인식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아주 작은 다른 선택을 시도해 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은 늘 침묵으로 버티던 장면에서 짧게라도 자신의 감정을 말해 볼 수 있습니다. 이 한 문장이 관계 속에서 그려지는 탈주선이 됩니다.

들뢰즈적 탈주선은 관계를 끊는 대신, 관계의 방식을 바꾸는 실험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사람은 사랑과 우정을 소유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되기를 도와주는 공간으로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상상은 관계 안에서 요구와 기대의 방식이 바뀔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상대에게 “나를 채워 달라”라고 요구하는 대신, “함께 어떤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 볼까”라고 제안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제안 역시 탈주선의 한 형태입니다.

3-3. 도시와 디지털 공간 속 들뢰즈적 탈주선

사람이 살고 있는 도시와 디지털 공간도 하나의 거대한 영토입니다. 도시의 구조는 사람의 이동 경로를 정하고, 디지털 플랫폼은 사람의 시선을 특정한 방향으로 몰아갑니다. 사람은 출근길과 퇴근길이 정해져 있고, 점심시간에 가는 카페와 저녁에 켜는 앱이 거의 고정되어 있습니다. 이때 탈주선은 익숙한 경로를 아주 조금 비틀어 보는 데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도시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평소와 다른 골목을 돌아가 보거나, 잘 가지 않던 동네를 일부러 걸어 볼 수 있습니다. 이 사소한 이동은 단순한 산책이 아니라, 도시라는 영토 위에 새로운 선을 긋는 행위입니다. 사람은 그 과정에서 다른 풍경과 다른 사람, 다른 감각을 경험합니다. 들뢰즈의 언어로 말하면, 사람은 도시와 맺는 관계 방식 자체를 조금 바꾸는 것입니다.

디지털 공간에서도 탈주선은 중요합니다. 알고리즘은 사람의 관심을 수집하고, 그에 맞는 콘텐츠를 계속 보여 줍니다. 사람은 편안함을 느끼지만, 동시에 비슷한 세계만 반복해서 보게 됩니다. 들뢰즈적 탈주선은 이 알고리즘이 그어 놓은 보이지 않는 경계를 가로지르는 실험입니다. 사람은 평소와 다른 주제의 콘텐츠를 찾아보고, 추천 목록에서 벗어난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직접 검색어를 바꾸고, 관심 없던 분야의 지식을 일부러 들여다봄으로써 디지털 공간에서 새로운 선을 그립니다.

4. 들뢰즈가 제안하는 탈주선의 실천 전략

지금까지 사람은 탈주선의 개념과 일상적인 사례를 살펴봤습니다. 이제 사람은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면 좋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들뢰즈는 자세한 사용 설명서를 제공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철학에서 몇 가지 실천 전략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이 전략들은 거창한 결단보다 작은 반복과 실험을 강조합니다.

4-1. 작은 균열을 내는 ‘미시적 탈주선’ 만들기

들뢰즈식 실천에서 중요한 것은 미시적 수준의 변화입니다. 사람은 인생을 통째로 뒤집는 결정에만 집착하면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마비되기 쉽습니다. 반대로 사람은 아주 작은 단위의 변화를 꾸준히 반복하면, 어느 순간 삶 전체의 구조가 바뀌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작은 변화를 들뢰즈적 표현으로 ‘미시적 탈주선’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하루를 돌아보며 “어디에 한 줄의 균열을 낼 수 있을까?”를 질문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늘 같은 시간에 같은 방식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면, 그 루틴에 작은 변형을 넣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출근 전 10분 동안 평소에 쓰지 않던 종류의 메모를 해 보거나, 짧은 글을 써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하루를 마무리하며 “오늘 내 안에서 가장 강하게 움직인 욕망은 무엇이었는가”를 적어 볼 수 있습니다. 이 기록은 욕망의 패턴을 인식하게 하고, 그 패턴 틈에서 다른 선택을 할 힘을 줍니다.

미시적 탈주선은 누가 봐도 번듯한 성과를 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남들이 보기에 하찮아 보이는 시도일수록 중요한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은 새로운 악기를 한 번 잡아 보거나, 예전에 포기했던 언어를 다시 펼쳐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이건 해 봐야 뭐가 되겠어?”라고 말하고 넘겼던 것들을 다시 불러내어, 작은 실험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도가 모일 때 탈주선은 하나의 흐름이 됩니다.

4-2. 리좀적 연결로 탈주선을 지속시키는 방법

들뢰즈는 나무와 대비되는 리좀 개념을 통해, 삶이 중심 없는 연결망처럼 퍼져 나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탈주선이 일시적인 충동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되기 위해서는, 리좀적 연결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새로운 시도를 하나의 고립된 이벤트로 두지 않고, 그것을 다른 활동과 느슨하게 연결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은 새로운 공부를 시작했다면 그 공부와 관련된 모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혼자만의 실험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면서, 탈주선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확장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시도한 작은 변화를 기록하고, 일정한 주기로 되돌아보면서 흐름을 관리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반복은 탈주선을 일회성이 아니라 삶의 구조로 만드는 작업입니다.

리좀적 연결은 반드시 같은 분야끼리만 연결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람은 전혀 다른 영역들을 엮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직장에서 배운 기술을 취미 활동에 적용하거나, 취미 활동에서 느낀 즐거움을 관계 맺는 방식에 참고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영역이 서로 연결될 때, 탈주선은 더 많은 방향으로 뻗어 나갑니다. 이때 사람은 자신이 한 가지 선이 아니라 여러 개의 선 위에서 동시에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됩니다.

5. 들뢰즈의 탈주선을 둘러싼 오해와 주의점

탈주선이라는 개념은 매력적이지만, 동시에 오해를 부르기 쉽습니다. 사람은 탈주선을 “모든 것을 버리기 위한 핑계”로 사용하거나, “지금의 삶을 부정해야만 좋은 것”이라고 오해하기도 합니다. 이런 오해는 들뢰즈 철학의 뉘앙스를 놓칠 때 생깁니다. 그래서 사람은 탈주선을 실천할 때 몇 가지 주의점을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5-1. 탈주선은 무책임한 파괴가 아니라는 점

들뢰즈가 말한 탈주선은 무책임한 행동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사람은 자신의 의무와 관계를 전부 버리는 선택을 “나의 탈주선”이라고 부르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선택은 종종 또 다른 얽힘을 낳습니다. 책임을 외면하고 도망친 자리는 죄책감과 불신으로 채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탈주선은 책임과 연결을 완전히 끊지 않습니다. 오히려 책임의 의미를 다시 정의하고, 연결의 방식을 조정하려 합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과도하게 부과된 책임을 재구성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합니다. 들뢰즈식 탈주선은 개인의 자유만 강조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조건을 함께 생각하게 합니다. 이 균형 감각이 있을 때, 탈주선은 파괴가 아니라 창조가 됩니다.

5-2. 건강한 탈주선과 자기파괴적 탈주선 구분하기

사람이 자신의 탈주선이 건강한지 확인하려면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이 선택이 나의 감각을 더 살아 있게 만드는가?”, “나는 이 움직임을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유지할 수 있는가?”, “이 변화가 나와 타인의 삶에 어떤 파장을 일으키는가?”를 차분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질문에 최소한의 답을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내리는 극단적인 결정은 자기파괴적 탈주선일 가능성이 큽니다.

건강한 탈주선은 사람에게 새로운 에너지를 공급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불안과 두려움도 함께 나타나지만, 그 불안은 완전히 붕괴되는 느낌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의 떨림에 가깝습니다. 반면 자기파괴적 탈주선은 사람을 점점 무력하게 만들고, 관계를 모두 끊어 버리며, 자신을 고립된 상태로 몰아갑니다. 들뢰즈적 관점에서 진짜 탈주선은 항상 새로운 연결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들뢰즈의 탈주선이 보여주는 새로운 삶의 방향

지금까지 이 글은 질 들뢰즈의 탈주선 개념을 중심으로, 현대인의 삶에서 얽힘을 풀고 새로운 방향을 찾아가는 철학적 방법을 살펴봤습니다. 사람은 일과 관계, 도시와 디지털 환경 속에서 다양한 선 위를 동시에 걸어가고 있습니다. 들뢰즈는 이 선들 중 일부가 지나치게 단단해져 사람을 묶어 버릴 때, 그 옆으로 다른 선을 그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다른 선이 바로 탈주선입니다.

들뢰즈가 말한 탈주선은 단순히 “지금 있는 곳을 떠나라”라는 극단적인 조언이 아닙니다. 탈주선은 자신의 삶을 둘러싼 구조와 욕망의 패턴을 세밀하게 관찰한 뒤, 그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실험입니다. 사람은 탈주선을 따라가면서 고정된 정체성에서 벗어나 되기의 존재로 자신을 다시 발견합니다. 사람은 더 이상 “원래 이런 사람”에 머물지 않고, “이렇게 되어 가는 중인 사람”으로 자신을 이해하게 됩니다.

탈주선은 현실을 버리는 선이 아니라, 현실을 다시 짜는 선입니다. 사람은 회사라는 영토 안에서도, 관계라는 구조 안에서도,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디지털 공간 안에서도 탈주선을 그릴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며, 완벽한 계획이 아니라 작은 실험의 반복입니다. 들뢰즈 철학은 이 실험들이 모여 하나의 새로운 삶의 지도를 만든다고 말합니다.

질 들뢰즈가 남긴 탈주선이라는 개념은 결국 이런 메시지를 전합니다. 사람의 삶에는 언제나 다른 길의 가능성이 숨어 있으며, 사람은 그 길을 발견하고 그려 넣을 수 있는 존재라는 메시지입니다. 탈주선은 이미 준비된 탈출구가 아니라, 스스로 그려야 하는 선입니다. 이 글이 독자가 자신의 삶에서 그 선을 상상하고, 아주 작은 한 줄부터라도 그어 볼 용기를 갖도록 돕는 계기가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오늘 당장 시작할 수 있는 나만의 탈주선 연습

이제 사람은 철학 이야기를 잠시 내려놓고, 자신의 오늘 하루를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나를 가장 숨 막히게 만드는 패턴은 무엇인가?”, “그 패턴에 아주 작은 균열을 낼 수 있는 행동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조용히 던져 볼 수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거창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작고 구체적일수록 좋습니다.

사람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들뢰즈식 탈주선 연습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 사람은 자신을 설명하는 대표 문장을 하나 고르고, 그 문장을 조금 수정해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원래 소심한 사람이다”를 “나는 아직 새로운 상황에 익숙해지는 중이다”로 바꾸는 것만으로도 되기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 사람은 일주일에 한 번, 평소라면 절대 선택하지 않았을 행동을 일부러 해 볼 수 있습니다. 새로운 길로 걸어가거나, 관심 없는 분야의 강연을 들어 보거나, 알고리즘이 추천하지 않은 책을 골라 보는 행동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 사람은 자신의 하루 중 가장 지치는 순간을 하나 고르고, 그 순간에 작은 변형을 시도해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늘 불만만 떠올리던 시간에 짧은 메모를 남기거나, 5분간 몸을 움직이는 루틴을 넣을 수 있습니다.
  • 사람은 한 달에 한 번, 자신의 욕망의 기록을 되돌아보고, 그 욕망이 어디를 향해 흘렀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 기록은 앞으로 어떤 탈주선을 그릴지 결정하는 소중한 자료가 됩니다.

들뢰즈의 탈주선은 철학자의 책 속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탈주선은 사람의 말투와 시선, 작은 습관과 관계의 방식 속에서 매일 새로 그려질 수 있습니다. 사람은 완벽하게 준비된 날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은 오늘의 피로와 얽힘을 인정하는 자리에서, 아주 짧은 한 줄의 다른 선을 그려 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사람이 그 한 줄을 그리는 순간, 질 들뢰즈가 말한 탈주선은 더 이상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자신의 삶 속에서 실제로 움직이는 힘이 됩니다. 그리고 그 힘이 조금씩 쌓일 때, 사람은 문득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한때 벗어나고 싶다고만 느꼈던 삶의 자리에서, 이미 다른 삶의 방향이 자라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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