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들뢰즈가 본 예술의 본질을 “재현이 아닌 창조”라는 관점에서 해석하고, 이 개념이 현대 예술뿐 아니라 사람의 일상과 창작 실무에 어떤 통찰을 줄 수 있는지 살펴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사람은 보통 예술을 현실을 더 아름답게, 더 정확하게, 더 감동적으로 “그려 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들뢰즈 예술철학은 이런 통념에 정면으로 질문을 던집니다. 들뢰즈는 예술이 이미 존재하는 세계를 복사하는 작업이 아니라, 아직 존재하지 않던 감각과 세계를 새롭게 창조하는 힘이라고 말합니다.
글의 구조는 개요, 서론, 본론, 결론, 마무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서론에서는 이미지와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에 왜 다시 들뢰즈 예술론을 꺼내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본론에서는 들뢰즈의 재현 비판을 출발점으로 감각·정동·감응 개념을 소개하고, 회화·영화·문학이라는 세 영역에서 들뢰즈 예술철학을 적용해 봅니다. 이어서 클리셰, 리좀, 탈영토화 같은 들뢰즈 특유의 개념과 연결하며 “창조의 조건”을 정리합니다. 마지막으로, 창작자와 관람자가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들뢰즈식 창조 연습을 제안합니다.
이 글은 철학 전공자가 아니어도 읽을 수 있도록, 들뢰즈의 난해한 예술론을 일상 언어로 풀어 쓰는 데 집중합니다. 사람은 이 글을 통해 “좋아 보이는 것을 흉내 내는 작업”과 “아직 이름 없는 것을 불러오는 작업”이 얼마나 다른지 감각적으로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들뢰즈가 본 예술의 본질이, 사실은 누구나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창조의 태도와도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미지 홍수 시대, 왜 지금 들뢰즈 예술철학인가
사람은 하루에도 수백, 수천 개의 이미지를 마주합니다. 사람은 스마트폰을 켜고, 짧은 영상과 사진, 밈과 광고를 스크롤 하면서 거의 자동적으로 수많은 이미지를 소비합니다. 예전에는 미술관이나 극장, 책을 찾아가야만 볼 수 있었던 예술적 이미지들이 이제는 손바닥 위에서 끝없이 재생됩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사람은 문득 이런 질문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미지가 많은데, 왜 점점 감흥은 줄어드는 것처럼 느껴질까?”
질 들뢰즈의 예술철학은 바로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언어를 제공합니다. 들뢰즈는 이미 오래전부터 재현 중심의 이미지를 비판하면서, 예술의 본질을 “새로운 감각과 정동을 생산하는 힘”으로 이해했습니다. 들뢰즈에게 문제는 이미지의 양이 아니라, 이미지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사람에게 작용하는가입니다. 사람은 단지 현실을 예쁘게 포장한 이미지에 둘러싸여 있을 때, 오히려 현실을 다르게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립니다. 들뢰즈는 예술이 이 능력을 되돌려 주는 장이라고 봅니다.
오늘날 사람은 인공지능 이미지 생성, 필터, 템플릿 같은 도구를 통해 “그럴듯한 그림”과 “그럴듯한 영상”을 손쉽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들뢰즈 예술론의 눈으로 보면, 이 “그럴듯함”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함정일 수 있습니다. 들뢰즈에게 예술의 가치는 사실성을 높이는 데 있지 않습니다. 들뢰즈에게 예술의 가치는 아직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하고, 아직 느끼지 못한 감각을 몸에 새겨 넣는 데 있습니다. 사람은 이 점에서 “잘 만든 복제물”과 “거칠지만 독창적인 창조”를 구분해야 합니다.
이 글에서 필자는 들뢰즈가 본 예술의 본질을 정리하면서, 독자가 자신의 창작과 감상 활동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독자는 “나는 지금 재현하고 있는가, 아니면 창조하고 있는가?”, “나는 익숙한 방식으로만 이미지를 소비하고 있는가, 아니면 낯선 감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볼 수 있습니다. 들뢰즈 예술철학은 이 질문들 속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들뢰즈가 본 예술의 본질 – 재현을 넘어 창조로
1. 들뢰즈 예술철학의 출발점: 재현 비판
들뢰즈 예술철학의 출발점은 “재현의 철학”에 대한 거부입니다. 전통적인 서양 철학은 현실의 뒤편에 “더 참된 원본”이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사람은 그 원본을 더 잘 반영하는 그림이나 글, 음악을 좋은 예술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들뢰즈는 이 구조를 뒤집습니다. 들뢰즈에게는 원본과 사본의 위계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들뢰즈에게 중요한 것은 “차이”와 “새로운 것의 생성”입니다.
들뢰즈는 예술이 이상적인 형태나 모델을 반복해서 복사하는 작업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들뢰즈에게 예술은 차이를 만드는 기계입니다. 작품 하나하나는 세계에 새로운 구멍을 뚫고, 새로운 감각의 통로를 열어 줍니다. 그래서 들뢰즈는 예술가를 “재현의 장인”이 아니라 “감각과 정동의 발명가”로 이해합니다. 이 관점은 예술가뿐 아니라, 예술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까지도 동시에 바꾸어 놓습니다.
1-1. 플라톤식 재현에서 들뢰즈적 차이로의 전환
사람은 흔히 예술을 “현실을 얼마나 잘 닮았는가”의 관점에서 평가합니다. 사람은 “정말 사진 같다”, “실제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실제 같다”라는 말을 최고 수준의 칭찬처럼 사용합니다. 이 관점은 고대 철학자 플라톤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재현의 사유”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플라톤에게 현실의 사물들은 “이데아”라는 완전한 원본을 불완전하게 모방하는 그림자였습니다. 그리고 예술은 그 그림자의 그림자를 다시 그리는 일을 했습니다.
들뢰즈는 이 구조가 차이를 억압한다고 말합니다. 들뢰즈에게 이데아는 창조의 기준이 아니라, 창조를 가두는 틀입니다. 들뢰즈는 예술을 이 틀에서 해방시키고자 합니다. 들뢰즈에게 중요한 것은 “원본에 얼마나 충실한가”가 아니라, “새로운 차이를 얼마나 생산하는가”입니다. 사람은 이 전환을 이해할 때, 자연스럽게 예술 감상 기준을 바꾸게 됩니다. 사람은 “얼마나 똑같은가”에서 “얼마나 다르게 보이게 만드는가”를 묻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은 한 도시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과, 같은 도시를 전혀 다른 색과 형태로 재구성한 그림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재현의 관점에서는 전자가 더 뛰어난 기술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들뢰즈 예술철학의 시선에서는 후자가 더 강한 창조의 힘을 지닌 작품일 수 있습니다. 후자는 도시라는 익숙한 대상을 낯설게 만들고, 그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감각을 다시 깨어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2. 들뢰즈에게 예술은 ‘이미 있는 것’의 복사가 아니다
들뢰즈에게 예술은 “이미 있는 것”을 다시 보여주는 장르가 아닙니다. 들뢰즈에게 예술은 “아직 없던 것”을 끌어오는 힘입니다. 이 말은 예술이 현실과 무관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예술은 현실이 스스로 말하지 못하던 감각과 정동을 드러냅니다. 사람이 일상 속에서 지나쳐 버리던 탄식과 기쁨, 두려움과 설렘이 예술 안에서 새로운 구성을 얻습니다.
들뢰즈는 예술 작품이 “세계에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조합”을 만들어낼 때 비로소 창조가 일어난다고 봅니다. 이 조합은 색채와 형태, 소리와 침묵, 단어와 문장, 움직임과 정지의 예상치 못한 배치를 통해 탄생합니다. 사람은 이런 작품을 마주할 때, 한동안 말을 잃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기존의 언어와 개념만으로 작품을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들뢰즈에게 바로 이 순간이 예술의 본질이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예술가는 현실을 복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현실에 아직 없던 감각을 “추가로” 만들어 넣는 존재입니다. 예술가는 세계를 더 두껍고 복잡하게 만듭니다. 예술가는 생활 속에서 마모된 감각의 피부를 다시 찢고, 사람에게 새로운 감응 능력을 돌려줍니다. 들뢰즈가 본 예술의 본질은 바로 이런 “감각의 추가, 세계의 증식”입니다.
2. 들뢰즈가 말하는 감각·정동·감응의 예술
들뢰즈 예술철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감각(sensation)”과 “정동(affect)”입니다. 사람은 감각과 감정을 비슷한 말로 사용할 때가 많지만, 들뢰즈는 두 개념을 신중하게 구분합니다. 이 구분을 이해하면, 왜 들뢰즈가 예술을 재현이 아닌 창조로 이해하는지 더 잘 보입니다.
2-1. 감정을 넘어서는 들뢰즈의 ‘감각’ 개념
사람은 감정을 “슬프다, 기쁘다, 화가 난다, 부럽다”처럼 언어로 쉽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감정은 어느 정도 정리된 상태의 내면입니다. 반면 들뢰즈가 말하는 “감각”은 언어로 쉽게 붙잡히지 않는, 더 원초적인 힘입니다. 감각은 몸이 세계와 맞닿을 때 발생하는 긴장, 떨림, 압력, 온도 같은 것입니다. 사람은 이 감각을 아직 정확한 말로 설명하지 못하지만, 몸은 이미 그 힘을 분명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들뢰즈에게 좋은 예술 작품은 감정을 직접적으로 묘사하기보다, 감각을 바로 몸에 전달합니다. 사람은 슬픈 장면을 설명하는 문장을 읽지 않아도, 작품 속 색과 리듬, 공간 구성만으로 복합적인 슬픔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때 사람은 “슬프다”라는 단어가 떠오르기 전에 이미 몸이 먼저 반응합니다. 들뢰즈는 이 반응을 예술의 핵심으로 봅니다.
이 관점에서 예술은 이야기나 메시지 전달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예술은 몸을 통과하는 물질적인 힘의 장입니다. 예술은 눈과 귀, 피부와 호흡을 동시에 건드립니다. 사람은 예술 작품을 볼 때, 머리로 이해하기 전에 이미 “느껴버린” 경험을 종종 합니다. 들뢰즈에게 이 경험이 바로 예술이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감각지도를 새로 그리는 창조라는 증거입니다.
2-2. 정동과 힘의 장으로서 들뢰즈 예술작품
정동은 감각과 비슷하지만, 조금 더 관계적이고 역동적인 차원의 개념입니다. 정동은 존재와 존재 사이를 오가는 힘, 서로를 바꾸어 놓는 에너지입니다. 사람은 특정한 작품을 보고 나서 하루 종일 어떤 무게나 가벼움을 몸에 지니고 다니기도 합니다. 사람은 누군가의 노래를 듣고 난 뒤 행동의 속도나 관계를 바라보는 태도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들뢰즈에게 이런 변화가 정동의 흔적입니다.
들뢰즈 예술철학은 작품을 하나의 “정동 기계”로 이해합니다. 작품은 감정을 설명하는 대신, 정동의 흐름을 만들고 안내합니다. 사람은 작품을 통해 자신도 몰랐던 정동의 스펙트럼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때 사람은 단지 예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통과하며 변형되는 존재”가 됩니다. 이 변형이 바로 들뢰즈가 말하는 창조의 효과입니다.
이런 정동의 관점에서 보면, 예술의 가치는 시장 가격이나 기술 난이도로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어떤 작품은 기술적으로 완벽해 보이지만, 정동의 흐름을 거의 생산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다듬어지지 않고 거칠어 보이는 작품이 강렬한 정동을 발생시키며 사람의 삶을 바꾸기도 합니다. 들뢰즈는 후자의 작품에서 예술의 본질을 봅니다. 들뢰즈에게 예술은 정동을 새로 구성하는 작업이며, 사람에게 새로운 힘의 장을 선물하는 기계입니다.
3. 들뢰즈 예술철학으로 읽는 회화·영화·문학
들뢰즈 예술론은 추상적인 개념에 머물지 않고, 구체적인 예술 장르들을 세밀하게 분석하면서 발전합니다. 사람은 들뢰즈를 통해 회화, 영화, 문학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세 장르를 간단히 살펴보며, 들뢰즈가 본 예술의 창조성이 각각 어떻게 드러나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3-1. 회화: 추상과 색채에서 드러나는 들뢰즈적 창조
회화에서 들뢰즈는 특히 추상적 경향의 작업에 주목합니다. 사람은 종종 추상화를 보며 “무엇을 그린 건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재현의 기준에서는 이 말이 비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들뢰즈에게 추상은 “무엇을 그리지 않았는가”가 아니라, “어떤 감각을 어떻게 끌어왔는가”로 평가해야 하는 장르입니다.
추상 회화에서 색과 선, 형태는 더 이상 사물을 재현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그 자체로 감각의 덩어리로 등장합니다. 사람은 붉은색이 피와 분노를 상징한다고 배워 왔지만, 어떤 작품에서는 붉은색이 전혀 다른 정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들뢰즈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예측 불가능성입니다. 들뢰즈는 회화를 “감각의 도식”을 깨뜨리는 실험으로 봅니다. 사람들이 너무 익숙해진 상징과 의미의 연결을 끊고, 색과 선이 다시 직접적인 힘을 발휘하게 만드는 작업이 회화의 창조성입니다.
사람이 들뢰즈 예술철학의 시선으로 그림을 볼 때, 사람은 “무엇이 그려져 있는가?”라는 질문보다 “이 그림이 내 몸에 어떤 압력과 리듬을 만들어 내는가?”라는 질문을 먼저 던지게 됩니다. 이 질문이 재현에서 창조로의 시선 전환을 상징합니다.
3-2. 영화: 운동-이미지에서 시간-이미지로 이동하는 예술
들뢰즈는 영화에 대해서도 방대한 사유를 남겼습니다. 여기서 들뢰즈에게 중요한 구분은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입니다. 전통적인 영화는 주로 운동-이미지의 논리에 따라 구성됩니다. 사건들이 원인과 결과의 사슬로 이어지고, 인물들은 목표를 향해 움직입니다. 사람은 이런 영화를 보면서 서사의 흐름을 따라가고, 화면의 운동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느낍니다.
그러나 들뢰즈가 관심을 가진 영화들은 시간-이미지에 더 가깝습니다. 시간-이미지의 영화는 서사가 느슨하거나 파편화되어 있고, 장면들의 연결이 논리적 원인-결과 관계에 종속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이 영화들을 볼 때,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보다 “지금 이 시간이 어떻게 늘어지고 접히고 휘어지고 있는가?”를 더 강하게 느끼게 됩니다. 들뢰즈는 이런 영화가 시간 자체를 창조하는 예술이라고 말합니다.
시간-이미지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인물의 행동이 아니라, 인물의 지각과 감각입니다. 카메라는 할 일 없는 인물의 얼굴을 오래 비추고, 비어 있는 풍경을 길게 보여 줍니다. 사람은 스토리의 긴장 대신, 시간 그 자체의 밀도와 공기를 체험하게 됩니다. 들뢰즈에게 이런 체험이야말로 재현을 넘어선 창조입니다. 영화는 단순히 현실의 시간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간의 질감을 만드는 예술이 됩니다.
3-3. 문학: 새로운 언어를 만드는 들뢰즈적 작가
문학에서 들뢰즈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언어의 창조적인 사용”입니다. 사람은 문학을 줄거리와 메시지 중심으로 읽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들뢰즈에게 진짜 문학은 줄거리나 교훈보다 “언어가 어떻게 변형되고 있는가”에서 드러납니다. 들뢰즈는 위대한 작가를 “기존 언어를 살짝 틀어 다른 언어처럼 만들어 버리는 사람”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들뢰즈 예술철학의 관점에서 문학 작품은 문법과 어휘, 문장 리듬을 통해 새로운 감각의 통로를 만듭니다. 사람은 문장을 읽으면서 그 내용뿐 아니라, 호흡과 박자, 말맛 자체에 반응합니다. 어떤 문장은 말이 끝난 뒤에도 머릿속에서 계속 울리고, 몸의 긴장을 바꾸기도 합니다. 들뢰즈는 이런 작가의 작업을 “언어를 탈영토화하는 일”이라고 표현합니다. 언어가 안정적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도구에서 벗어나, 다시 살아 있는 힘이 되는 순간입니다.
사람이 들뢰즈 예술철학의 시선으로 소설이나 시를 읽으면, 사람은 “이 작품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와 더불어 “이 작가는 언어를 어디까지 밀어붙이고 있는가?”를 함께 보게 됩니다. 그 질문 속에서 문학의 창조성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4. 들뢰즈 예술론과 창조의 조건
들뢰즈에게 예술은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현실의 감각 구조를 바꾸는 창조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창조가 일어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무엇일까요? 들뢰즈 예술철학은 그 조건을 “클리셰와의 싸움”, “리좀적 연결”, “탈영토화” 같은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4-1. 클리셰와 싸우는 예술가의 고독
사람은 익숙한 것에 끌립니다. 사람은 이미 알고 있는 형태와 이야기, 색채와 구도를 좋아합니다. 이런 반복을 들뢰즈는 “클리셰”라고 부릅니다. 클리셰는 나쁜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클리셰 덕분에 세상을 빠르게 이해하고, 서로 소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술의 관점에서는 클리셰가 위험해집니다. 예술이 클리셰를 그대로 따라가기 시작하면, 작품은 더 이상 새로운 감각을 만들지 못하고, 이미 소모된 감정을 재탕하는 수준에 머물게 됩니다.
들뢰즈 예술철학에서 예술가는 클리셰와 끊임없이 싸우는 사람입니다. 예술가는 시장이 요구하는 익숙한 스타일과, 관객이 기대하는 안전한 감동을 일부러 거부합니다. 예술가는 자신이 이미 능숙해진 방식조차 의심합니다. 이 싸움은 예술가에게 고독을 가져옵니다. 사람은 새로운 감각을 처음 마주할 때 종종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들뢰즈는 바로 이 고독 속에서만 진짜 창조가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창작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지점을 공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어느 순간 자기 복제의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미 반응이 좋았던 형식을 반복하고, 안전한 감정선만을 선택하게 됩니다. 들뢰즈 예술론은 이 순간에 질문을 던집니다. “지금 이 작업은 정말로 새로운 감각을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 과거의 성공을 재현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창작자에게는 불편하지만, 동시에 매우 생산적인 자극입니다.
4-2. 리좀과 탈영토화, 예술적 창조의 들뢰즈적 선
들뢰즈 예술철학에서 창조의 또 다른 조건은 “연결 방식의 변화”입니다. 들뢰즈는 나무 구조와 대비되는 “리좀”을 통해 새로운 연결 방식을 설명합니다. 나무 구조는 뿌리와 줄기, 가지로 이어지는 위계적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예술 교육이 이 나무 구조를 따라갑니다. 사람은 “정석”을 배우고, “정답” 같은 구도를 익히고, 그 위에 약간의 응용을 더합니다.
반면 리좀은 어느 한 중심 없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뿌리줄기입니다. 들뢰즈는 예술이 리좀처럼 작동할 때 더 큰 창조성이 발생한다고 봅니다. 예술가는 한 장르 안에 갇히지 않고, 여러 장르와 매체를 가로지르며 새로운 조합을 만듭니다. 음악과 영상, 글과 퍼포먼스, 회화와 설치가 서로 연결됩니다. 이런 연결은 계획된 이론보다는 우연한 만남과 실험에서 자주 나타납니다. 들뢰즈에게 예술가는 이 우연을 적극적으로 환영하는 사람입니다.
“탈영토화”라는 개념 역시 예술적 창조와 깊이 연결됩니다. 영토화는 어떤 형식이나 규칙이 굳어져,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반대로 탈영토화는 그 굳어짐에서 벗어나 다른 영역과 연결되는 움직임입니다. 예술가는 장르의 영토, 언어의 영토, 시장의 영토에서 일정 부분 벗어나야 합니다. 사람은 탈영토화를 통해, 자신이 예술을 만들어 온 방식 자체를 다시 구성할 수 있습니다.
결국 들뢰즈 예술철학에서 창조의 조건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클리셰에 저항하는 용기를 가져야 하고, 리좀처럼 다양한 연결을 실험해야 하며, 영토에서 탈주하여 새로운 선을 그리려는 집요함을 가져야 합니다. 이 조건들은 추상적으로 보이지만, 실제 창작 과정 속에서 매우 구체적인 선택들로 나타납니다.
5. 일상과 창작 실무에 적용하는 들뢰즈 예술철학
지금까지의 논의가 너무 이론적으로 느껴졌다면, 이제는 시선을 사람의 일상과 구체적인 창작 실무로 옮겨 볼 차례입니다. 들뢰즈 예술철학은 예술가에게만 필요한 고급 이론이 아닙니다. 사람은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프레젠테이션을 만들고, SNS 피드를 구성하는 모든 순간에 “재현”과 “창조” 사이에서 선택합니다. 들뢰즈는 이 선택의 순간을 더 의식적으로 만들라고 권하는 셈입니다.
5-1. 창작자를 위한 들뢰즈식 작업 전략
창작을 하는 사람에게 들뢰즈 예술철학은 몇 가지 실질적인 전략을 제안합니다.
첫째, 사람은 작업 초반에 “재현의 습관”을 일부러 늦추는 연습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은 글을 쓸 때 처음부터 “완성된 구조”를 떠올리기보다, 단어와 문장이 만들어 내는 리듬과 이미지를 먼저 따라가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그림을 그릴 때, 사물의 외형을 정확히 따기 전에 색과 선이 자유롭게 흘러가도록 놔두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이 느슨한 초반이 새로운 감각을 끌어오는 중요한 단계가 됩니다.
둘째, 사람은 작업 과정에서 “클리셰 점검” 시간을 정기적으로 넣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이 장면, 이 문장, 이 구성은 어디선가 많이 본 것은 아닌가?”, “이 효과는 이미 지겹도록 사용된 것은 아닌가?” 이 질문이 떠오를 때, 사람은 완전히 다른 방향의 선택을 최소한 하나 이상 시도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시도가 최종 결과물에 포함되지 않더라도, 작업 전체의 감각을 확장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셋째, 사람은 자신의 작업을 다른 장르와 연결하는 리좀적 실험을 할 수 있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사진이나 드로잉을 곁들여 보고, 음악을 하는 사람은 영상과 설치를 함께 탐색해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완성도 높은 복합 장르 작품”을 만들겠다는 욕심이 아니라, 다른 감각과 회로를 열어 보는 경험 자체입니다. 이 경험이 새롭고 특이한 아이디어의 씨앗이 됩니다.
5-2. 관람자·독자를 위한 들뢰즈적 감상법
들뢰즈 예술철학은 관람자와 독자의 역할도 바꿔 놓습니다. 사람은 작품을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작품과 함께 새로운 감각을 창조하는 공동 작업자가 됩니다. 들뢰즈적 감상법은 몇 가지 간단한 태도에서 시작합니다.
첫째, 사람은 작품을 볼 때 “무엇을 말하려는지”를 너무 빨리 판단하지 않는 연습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줄거리와 메시지를 단번에 정리하려 하지 말고, 작품이 만들어 내는 리듬과 정동을 잠시 그대로 느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화면의 색, 소리의 층위, 문장의 속도, 침묵의 길이를 의식적으로 맛보는 감상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이때 사람은 비로소 감각의 차원에서 작품을 만나게 됩니다.
둘째, 사람은 낯선 작품 앞에서 느끼는 불편함을 너무 빨리 “이해 안 됨”이라는 말로 밀어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들뢰즈 예술철학의 관점에서는 이 불편함이야말로 새로운 감각이 침투하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사람은 그 불편함과 잠시 함께 머무르며, “왜 이 작품은 나를 편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까?”, “어떤 기대가 깨졌기 때문에 이런 거부감이 생길까?”를 스스로에게 묻고, 그 답을 메모해 볼 수 있습니다.
셋째, 사람은 작품과 자신의 일상을 연결해 보는 연습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예술 작품이 보여 준 감각의 구조를 자신의 하루에 대입해 보며, “이 작품의 리듬과 정동이 내 일상의 어느 부분과 닿아 있는가?”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 상상은 작품을 단순한 관람의 대상으로 두지 않고, 삶의 일부로 끌어오는 들뢰즈적 방식입니다. 이때 예술은 더 이상 특별한 장소에서만 만나는 대상이 아니라, 사람의 삶 전체를 재구성하는 동료가 됩니다.
들뢰즈 예술철학이 남기는 것
이 글은 들뢰즈가 본 예술의 본질을 “재현이 아닌 창조”라는 관점에서 정리해 보았습니다. 사람은 흔히 예술을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나, 현실을 조금 더 아름답게 꾸며 주는 장식물로 여깁니다. 그러나 들뢰즈 예술철학은 이 이미지를 넘어갑니다. 들뢰즈에게 예술은 현실에 아직 존재하지 않던 감각과 정동을 끌어오는 기계이며, 세계를 더 두껍고 복잡하게 만드는 창조 행위입니다.
들뢰즈 예술론은 몇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남깁니다. 예술은 원본의 복사가 아니라 차이의 생산이라는 점, 감정의 설명이 아니라 감각과 정동의 장을 구성하는 힘이라는 점, 회화·영화·문학 등 다양한 장르에서 언어와 시간, 색과 몸을 새롭게 조직한다는 점, 그리고 이 모든 작업이 클리셰와의 싸움과 리좀적 연결, 탈영토화 같은 조건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이 메시지는 전문 예술가뿐 아니라, 일상 속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느끼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이메일 한 통을 쓰더라도, 발표 자료를 만들더라도, SNS에 사진 한 장을 올리더라도 재현과 창조 사이에서 선택합니다. 사람은 익숙한 형식만을 반복할 수도 있고, 그 틀을 살짝 비틀어 새로운 감각을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들뢰즈 예술철학은 그 선택의 순간을 더 의식적으로 만들라고 요청합니다.
결국 들뢰즈가 본 예술의 본질은 “아직 오지 않은 감각을 위해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술가는 그 자리를 열어 두는 사람이고, 관람자는 그 자리로 들어가 변형을 겪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이 과정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세계가 어떤 곳인지 다시 묻게 됩니다. 이 질문이 계속 이어지는 한, 예술과 철학은 함께 살아 있을 것입니다.
오늘 시작할 수 있는 작은 들뢰즈식 창조 연습
이제 글을 마무리하면서, 독자가 오늘 당장 시도해 볼 수 있는 작은 들뢰즈식 창조 연습을 몇 가지 제안해 보겠습니다. 이 연습들은 거창한 프로젝트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재현의 습관을 잠시 멈추고 창조의 가능성을 열어 두는 실천입니다.
- 독자는 오늘 하루에 찍는 사진 중 단 한 장만이라도 “잘 나온 사진”이 아니라 “낯선 사진”을 목표로 찍어 볼 수 있습니다. 독자는 구도와 얼굴을 정렬하기보다, 흔들림이나 어색한 순간을 그대로 담아 보는 실험을 할 수 있습니다.
- 독자는 짧은 글을 하나 쓸 때,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를 미리 정하지 않고, 떠오르는 단어나 이미지 몇 개를 먼저 적어 본 뒤 문장을 이어 가는 연습을 할 수 있습니다. 이때 독자는 재현보다 감각을 따라가 보며 글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지켜볼 수 있습니다.
- 독자는 평소 좋아하지 않던 예술 장르를 하나 골라, 최소한 한 작품을 끝까지 감상해 보는 도전을 할 수 있습니다. 독자는 그 작품을 “이해했는가”보다 “어디에서 불편했는가, 어디에서 몸이 멈췄는가”를 적어 보며 들뢰즈적 감상 노트를 만들어 볼 수 있습니다.
- 독자는 자신의 작업이나 취미에서 자주 사용하는 ‘안전한 방식’을 하나 떠올리고, 그 방식을 일부러 사용하지 않는 작은 과제를 설정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진을 늘 같은 필터로 보정하던 사람은 오늘만큼은 필터 없이 색을 조정해 볼 수 있습니다.
- 독자는 하루를 마무리하며 “오늘 나는 어떤 새로운 감각을 한 번이라도 느꼈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떠오르는 장면을 한두 문장으로 남길 수 있습니다. 이 기록은 독자의 삶에 들뢰즈식 창조의 흔적을 쌓아 가는 작은 리좀 노트가 됩니다.
들뢰즈 예술철학은 사람에게 완벽한 예술가가 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들뢰즈 예술철학은 사람에게 자신의 감각을 조금 더 믿고, 익숙한 틀을 조금 더 의심하며, 낯선 것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가 보자고 제안합니다. 독자가 이 제안 중 단 하나라도 오늘 실천해 본다면, 이미 들뢰즈가 본 예술의 본질, 즉 재현이 아닌 창조의 길 위에 올라선 것입니다.
앞으로 독자가 작품을 만들거나, 다른 사람의 예술을 만날 때마다 “지금 여기에서 어떤 새로운 감각이 태어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떠올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질문이 계속되는 한, 독자의 삶 자체가 하나의 긴 예술 작업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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