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뢰즈 시선으로 다시 보는 과잉 정보 사회와 욕망
현대인은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순간부터 과잉 정보 속으로 밀려 들어간다. 사람은 SNS 피드, 뉴스 알림, 유튜브 추천, 쇼핑앱 푸시까지 수십 개의 창을 통해 단 몇 초 만에 수백 개의 이미지와 문장을 마주한다. 사람은 이 정보의 파도 속에서 자기 욕망을 분명하게 느끼기보다, 타인의 욕망과 광고가 섞인 흐름에 휩쓸리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이런 상황에서 질 들뢰즈의 철학은 흥미로운 안내 지도가 된다. 들뢰즈 철학은 욕망을 단순한 결핍이나 감정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산하고 연결하는 힘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들뢰즈의 욕망 개념과 리좀, 시뮬라크르 같은 아이디어를 과잉 정보 사회에 직접 연결해서 다룬다. 필자는 들뢰즈 철학이 추상적인 개념놀이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사람이 스마트폰을 들고 스크롤을 내리는 그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분석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사람은 “왜 나는 이렇게 피곤한데도, 계속해서 정보를 찾고 있을까?”, “왜 나의 욕망은 점점 나만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까?”라는 질문을 품고 있다. 들뢰즈를 불러오는 이 글의 목적은 바로 이 질문들에 다른 각도의 답을 시도해 보는 데 있다.
글은 개요, 서론, 본론, 결론, 마무리의 흐름으로 구성된다. 개요에서는 들뢰즈와 과잉 정보 사회라는 큰 틀을 잡고, 서론에서는 정보 피로와 욕망의 혼란이라는 문제를 구체적으로 풀어 낸다. 본론에서는 들뢰즈 철학의 핵심 개념을 정보 사회에 적용해 보고, 알고리즘과 플랫폼 자본주의 속에서 욕망이 어떻게 복제되는지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결론과 마무리에서는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실천적 질문에 들뢰즈식으로 답을 해 본다.
들뢰즈 철학이 말해 주는 ‘정보 피로’와 욕망의 혼란
사람은 요즘 시대를 “과잉 정보 사회”라고 부른다. 사람은 원하는 것을 검색창에 몇 글자만 입력하면, 수십만 개의 결과를 몇 초 안에 받아볼 수 있다. 사람은 이 사실을 놀라운 편리함으로 느끼지만, 동시에 설명하기 어려운 피로감과 허탈감을 함께 느낀다. 사람은 어떤 정보를 찾고자 했는지조차 잊은 채, 링크와 영상 사이를 떠돌다가 하루를 마치는 경우도 많다. 이때 사람은 누가 자신의 시간을 설계하고 있는지, 누가 자신의 욕망을 끌고 다니는지 잘 모른 채 살아간다.
들뢰즈 철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힘을 발휘한다. 들뢰즈는 욕망을 소비의 결과가 아니라 생산의 시작점으로 보았다. 들뢰즈에게 욕망은 ‘~을 갖고 싶다’라는 결핍의 감정보다, ‘~을 만들고 연결하고 변화시키고 싶다’라는 힘에 가깝다. 그런데 과잉 정보 사회에서는 이 욕망의 생산성이 플랫폼과 광고 시스템 안으로 포획된다. 사람은 자기 욕망을 따라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플랫폼이 설계한 길 위를 걷는 경우가 많다. 들뢰즈 관점에서 보면, 사람의 욕망-기계는 거대한 데이터·알고리즘 기계와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필자는 서론에서 몇 가지 익숙한 장면을 떠올리고자 한다. 사람은 침대에 누워 잠깐만 SNS를 보려다가 두 시간 동안 계속 스크롤을 내린다. 사람은 유튜브에서 공부 영상을 검색했다가, 어느새 먹방과 브이로그를 보고 있다. 사람은 쇼핑앱에 들어가서 필요 없는 물건까지 장바구니에 담는다. 이런 장면에서 사람은 스스로를 탓하지만, 들뢰즈는 다른 질문을 던진다. “정말로 이 욕망은 너 혼자 만든 것인가, 아니면 어디선가 복제되어 흘러 들어온 것인가?”
들뢰즈와 함께 이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조금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사람은 더 이상 “내 의지가 약해서 그래”라고 단순하게 결론 내리지 않게 된다. 사람은 자신과 알고리즘, 광고, 타인의 욕망이 얽혀 있는 전체 구조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이해가 곧바로 해방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나는 왜 이 패턴에서 계속 반복되는가”를 스스로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준다. 그 언어가 바로 들뢰즈 철학이다.
들뢰즈와 과잉 정보 사회에서 무한 복제되는 욕망
1. 들뢰즈 철학으로 읽는 과잉 정보 사회의 기본 구조
1-1. 들뢰즈 욕망 개념: 결핍이 아니라 생산하는 힘
들뢰즈 철학에서 욕망은 늘 오해를 받는 개념이다. 많은 전통 철학과 심리학에서 욕망은 “가지지 못한 것을 향한 결핍”으로 설명된다. 사람은 없는 것을 갖고 싶어 하고, 그 결핍 때문에 고통을 느끼며, 충족을 향해 움직인다. 그러나 들뢰즈에게 욕망은 단순한 결핍이 아니다. 들뢰즈는 욕망을 “무언가를 새롭게 생산하고 연결하는 힘”으로 이해한다. 욕망은 빈틈이 아니라 에너지이다.
사람은 콘텐츠를 소비할 때도 단순히 구경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영상과 글에서 아이디어를 얻고, 그것을 자신의 상상과 결합시키고, 때로는 새로운 창작이나 행동으로 이어 나간다. 들뢰즈 관점에서는 이 전체 과정이 욕망의 생산이다. 사람의 욕망은 정보의 흐름 속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과잉 정보 사회에서는 이 생산 에너지가 자주 한 방향으로만 사용된다. 사람의 욕망은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저장하고, 더 많이 사는” 흐름으로 흘러간다. 들뢰즈가 보기에는 욕망이 가진 잠재력이 플랫폼 구조 안에서 일종의 단순 반복으로 축소된다. 욕망은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대신, 같은 쇼핑몰, 같은 앱, 같은 서비스로 계속 되돌아온다. 이때 욕망은 여전히 강하지만, 그 힘은 특정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만 사용된다.
1-2. 들뢰즈 리좀 개념과 디지털 네트워크의 닮은점
들뢰즈 철학에서 리좀 개념은 매우 유명하다. 들뢰즈는 리좀을 땅속에서 옆으로 뻗어 나가는 뿌리줄기의 형상으로 설명했다. 리좀은 시작점과 끝점이 분명하지 않고, 어디서든 새로운 가지가 나올 수 있으며, 중심과 주변의 구분이 흐릿한 구조를 가진다. 들뢰즈는 이 리좀을 지식, 사회, 욕망의 구조를 설명하기 위한 은유로 사용했다.
디지털 네트워크를 떠올려 보면, 사람은 들뢰즈 리좀 개념과 놀라운 닮은점을 발견하게 된다. 인터넷은 위계적 나무 구조가 아니라, 클릭과 링크를 통해 어디로든 이어질 수 있는 연결망이다. 사람은 하나의 영상을 보다가 댓글에서 다른 링크를 타고, 다시 그곳에서 또 다른 채널로 흘러간다. SNS에서는 한 사람의 게시물이 해시태그와 알고리즘을 통해 전혀 예상치 못한 사용자에게 도달한다. 이 모든 움직임은 리좀적 특성을 보여 준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도 있다. 들뢰즈가 상상한 리좀은 자유로운 다중 연결과 예측 불가능성을 강조했다. 반면 오늘의 디지털 리좀은 알고리즘이라는 보이지 않는 필터를 통해 관리된다. 사람의 클릭과 체류 시간, 관심사가 데이터로 수집되고, 그 데이터에 따라 리좀의 특정 길들이 강조되고 다른 길들은 잘 보이지 않게 된다. 겉으로는 무한한 연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사람은 자주 비슷한 유형의 콘텐츠 속에서만 맴돌게 된다.
들뢰즈 관점에서 과잉 정보 사회는 리좀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리좀을 통제하려는 힘이 강하게 작동하는 장이다. 사람의 욕망은 여러 방향으로 뻗어나가고 싶어 하지만, 플랫폼은 그 욕망을 특정한 소비·시청 패턴으로 모으려 한다. 이 긴장 속에서 사람의 피로감과 혼란이 커진다.
1-3. 들뢰즈 시뮬라크르 개념과 끝없는 복제 이미지
들뢰즈 철학에서 시뮬라크르는 “원본 없는 복제”라는 표현으로 자주 설명된다. 사람은 전통적으로 “진짜”와 “가짜”, “원본”과 “사본”을 구분해 왔다. 그러나 들뢰즈는 현대 사회에서 이 구분이 점점 무의미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사람은 이미지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지만, 그 이미지들 자체가 서로를 복제하고 변형하면서 더 이상 분명한 원본을 가리키지 않는 상황에 놓인다.
과잉 정보 사회의 SNS와 영상 플랫폼을 떠올려 보면, 사람은 시뮬라크르의 세계를 실감하게 된다. 사람은 여행지를 실제로 가 보기 전, 이미 수많은 인스타그램 사진과 브이로그를 통해 그 장소를 ‘알고 있다’. 사람은 제품을 사기 전, 리뷰 영상과 후기 글을 통해 그 제품을 ‘이미 사용해 본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이 이미지들은 실제 경험의 원본이 아니라, 서로를 복제하고 편집한 수많은 버전일 뿐이다.
들뢰즈가 말한 시뮬라크르 세계에서 욕망은 어떻게 움직일까? 사람의 욕망은 실제 경험을 향한다기보다, 이미지가 약속하는 느낌을 향한다. 사람은 “저렇게 살고 싶다”, “저런 몸, 저런 집, 저런 일상을 갖고 싶다”라고 생각하지만, 그 대상은 이미 수십 번 편집되고 연출된 시뮬라크르이다. 과잉 정보 사회에서는 욕망이 실제보다 이미지에 더 밀착되어 움직인다. 이때 욕망은 무한히 복제되는 이미지들을 따라 흘러가며, 실감나는 만족을 느끼기 전에 이미 다음 이미지로 이동해 버린다.
들뢰즈 관점에서 이 상황은 단순히 “가짜에 속는 세상”이라는 도덕적 비난으로 끝나지 않는다. 들뢰즈는 오히려 이 시뮬라크르의 바다에서 욕망이 어떤 새로운 조합과 생성의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묻는다. 사람은 복제 이미지에 휘둘릴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 이미지를 변형하고 재조립해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성할 수도 있다. 그 출발점은 “내가 지금 욕망하는 것은 무엇의 복제인가?”라는 자각이다.
2. 들뢰즈와 알고리즘: 욕망은 어떻게 과잉 복제되는가?
2-1. 들뢰즈 욕망-기계와 플랫폼 알고리즘의 만남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을 설명하기 위해 “욕망-기계”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사람의 욕망-기계는 다른 기계들과 맞물려 돌아간다. 사람의 욕망은 혼자 작동하지 않고, 사회 구조, 경제 시스템, 기술 환경과 연결되어 움직인다. 과잉 정보 사회에서 욕망-기계와 가장 밀접하게 맞물려 있는 것은 플랫폼의 알고리즘이다.
플랫폼 알고리즘은 사람의 클릭, 시청 시간, 검색 기록을 바탕으로 “이 사람이 무엇을 좋아할 것이다”를 예측한다. 그리고 플랫폼은 그 예측에 맞는 콘텐츠를 계속 추천한다. 사람은 “내가 보고 싶어서 본다”고 느끼지만, 들뢰즈 관점에서 보면 사람의 욕망-기계는 이미 알고리즘-기계와 결합된 하나의 큰 장치를 이루고 있다. 이 장치 안에서 욕망은 특정한 방향으로 증폭되고, 복제되고, 관리된다.
예를 들어, 사람이 운동 관련 영상을 몇 개 보기 시작하면, 플랫폼은 더 극단적인 다이어트, 더 자극적인 몸 변신 콘텐츠를 보여 준다. 사람의 욕망은 “조금 건강해지고 싶다”에서 시작했지만, 알고리즘과 결합하면서 “더 말라야 한다”, “더 빨리 변해야 한다”라는 형태로 변형된다. 이 과정에서 욕망은 복제될 뿐 아니라, 강도와 방향까지 조정된다.
2-2. 들뢰즈 반복 개념으로 보는 ‘무한 스크롤’의 유혹
들뢰즈 철학에서 반복은 단순히 “같은 것을 되풀이하는 행위”가 아니다. 들뢰즈는 반복 속에 항상 차이가 숨어 있다고 말했다. 사람은 단순히 ‘같은 영상’을 반복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형식 속에서 조금씩 다른 자극을 찾는다. 플랫폼의 무한 스크롤과 자동 재생 기능은 이 반복-차이 구조를 교묘하게 활용한다.
사람은 같은 유형의 쇼츠를 계속 넘기면서, 매번 조금씩 다른 자극을 기대한다. 사람은 “이번에는 더 웃기겠지”, “이번에는 더 유용하겠지”라는 희미한 기대를 품고 엄지를 움직인다. 이 반복 속에서 사람의 욕망은 계속해서 “다음 것”을 향한다. 그러나 그 다음 것은 이전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들뢰즈의 말대로라면, 이 반복은 차이를 최소화하면서 계속 연장되는 특수한 반복이다.
들뢰즈 관점에서 문제는 단순히 “시간 낭비”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욕망이 점점 현재에 머무르지 못하게 된다는 점이다. 사람의 욕망은 지금 보고 있는 것에서 만족을 느끼기 전에, 이미 그다음 콘텐츠를 예감한다. 욕망은 현재 대신 곧 도착할 다음 자극에 기대고 서 있다. 이런 구조에서는 깊이 있는 몰입과 집중이 자라기 어렵다. 사람의 욕망은 넓게 퍼지지만, 얕은 곳에서 빠르게 증발한다.
2-3. 들뢰즈 관점에서 본 자기계발·소비 콘텐츠의 과잉
과잉 정보 사회에서 유독 눈에 띄는 영역이 있다. 바로 자기계발과 소비 관련 콘텐츠이다. 사람은 “이렇게 하면 인생이 바뀐다”, “한 달 만에 성공하는 법”, “누구나 할 수 있는 부업”, “인생템 추천”, “올해 꼭 사야 할 아이템” 같은 제목을 하루에도 수십 번 본다. 이런 콘텐츠는 사람의 불안을 자극하고, 동시에 해답을 약속한다.
들뢰즈 관점에서 자기계발·소비 콘텐츠의 과잉은 욕망이 복제되는 대표적인 장면이다. 사람의 욕망은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는 아주 기본적인 감정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이 욕망은 콘텐츠 속에서 비슷한 포맷과 문장으로 무한히 복제된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욕망을 그대로 가져와 자신의 욕망인 것처럼 느끼기 쉽다. “나도 저렇게 돈 벌고 싶다”,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라는 생각이 반복될수록, 욕망의 언어는 점점 타인의 말투를 닮아 간다.
들뢰즈는 욕망을 타자의 코드로부터 탈주시키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보았다. 사람은 자기계발 콘텐츠를 완전히 끊을 수는 없을지라도, 적어도 “지금 이 욕망의 말투는 누구에게서 온 것인가?”를 물어볼 수 있다. 사람은 남의 성공 스토리를 볼 때, “이 이야기에서 나는 무엇을 복제하고 무엇을 변형하고 싶은가?”를 구분해 볼 수 있다. 이 구분이 가능해질 때, 사람의 욕망은 단순 복제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생성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3. 들뢰즈 철학으로 실천하는 과잉 정보 사회의 생존 전략
3-1. 들뢰즈 노마드 개념으로 재구성하는 콘텐츠 사용 습관
들뢰즈 철학에서 노마드는 단순히 “떠돌이”가 아니다. 들뢰즈에게 노마드는 기존의 경계와 규칙을 가볍게 넘나들며, 고정된 정체성과 자리를 거부하는 존재이다. 과잉 정보 사회에서 사람은 “정착민형 사용자”가 되기 쉽다. 사람은 몇 개의 플랫폼과 몇 개의 포맷에 정착해, 매일 같은 방식으로 콘텐츠를 소비한다.
들뢰즈 노마드 개념을 적용하면, 사람은 콘텐츠 사용 습관을 조금 다르게 설계할 수 있다. 사람은 한 플랫폼 안에서만 순환하기보다, 의도적으로 플랫폼 사이를 이동할 수 있다. 사람은 숏폼 영상에만 머무르지 않고, 긴 글이나 책으로 건너가는 시도를 해 볼 수 있다. 사람은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것만 보지 않고, 직접 키워드를 입력해 스스로 탐색하는 시간을 만들 수 있다. 이런 움직임은 디지털 공간에서의 노마드적 실천이다.
중요한 것은 완벽한 절제가 아니라, 패턴의 균열이다. 사람은 매일 30분이라도 “내가 선택한 길”을 따라 정보를 탐색해 볼 수 있다. 사람은 이 30분 동안만큼은 추천 탭을 닫고, 스스로 링크를 고르고, 스스로 창을 연다. 들뢰즈적 노마드는 바로 이런 작은 이탈에서 시작된다.
3-2. 들뢰즈가 말하는 ‘공백의 정치’: 정보 단식과 욕망 회복
들뢰즈 철학은 끊임없는 생성과 흐름을 강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속해서 자극을 늘리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들뢰즈는 일정한 “공백”과 “차단”이 새로운 생성의 조건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사람은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않는 시간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미세한 욕망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다.
과잉 정보 사회에서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느끼기도 전에 이미 누군가가 선별해 준 자극을 받아들인다. 이 흐름을 잠깐 멈추려면, 의식적인 정보 단식이 필요하다. 사람은 하루 중 특정한 시간대를 정해서 스마트폰을 다른 방에 두거나, 최소한 알림을 모두 끄는 실험을 해 볼 수 있다. 이 시간 동안 사람은 산책을 하거나, 손으로 글을 쓰거나, 멍하니 창밖을 바라볼 수도 있다.
들뢰즈식 공백의 정치는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을 낭비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이 공백 속에서 욕망은 플랫폼의 언어를 잠시 벗어나,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는다. 사람은 “나는 지금 정말 무엇이 궁금한가?”, “나는 무엇을 만들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남이 아닌 자신에게 직접 던질 수 있다. 이때 비로소 욕망은 무한 복제의 회로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자신만의 방향을 다시 잡을 수 있다.
3-3. 들뢰즈 리좀 전략으로 나만의 정보·욕망 지도 만들기
들뢰즈 리좀 개념은 통제된 네트워크가 아니라, 열린 연결망을 상징한다. 과잉 정보 사회에서 플랫폼은 사람을 위해 “편리한 지도”를 제공한다. 사람은 인기 순위, 추천 목록, 알고리즘 큐레이션을 따라 움직인다. 하지만 들뢰즈 철학은 사람에게 묻는다. “너는 너만의 리좀 지도를 가지고 있는가?”
사람은 나만의 정보·욕망 지도를 만들기 위해 아주 구체적인 실천을 할 수 있다. 사람은 스스로 관심 분야를 몇 가지 키워드로 정리하고, 각 키워드에 대해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골라 저장해 둔다. 사람은 북마크 폴더나 메모 앱을 활용해서 자신의 리좀을 손으로 그리듯 구성할 수 있다. 이 지도는 플랫폼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다.
들뢰즈 리좀 전략의 핵심은 “의식적인 연결”이다. 사람은 우연히 떠밀려온 정보들 사이에서 헤매기보다, 내가 왜 이 링크를 열었는지, 이 정보가 내 삶과 어떤 연결을 맺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다. 사람은 이 질문을 통해, 욕망이 흘러가는 길을 조금씩 수정해 갈 수 있다.
3-4. 들뢰즈식 ‘작은 실험’으로 욕망을 다시 쓰는 일상 연습
들뢰즈 철학은 거대한 혁명보다 일상의 작은 실험을 중요하게 본다. 들뢰즈에게 생성은 한 번의 극적인 변화가 아니라, 많은 미세한 움직임들의 축적이다. 과잉 정보 사회에서 사람은 욕망을 다시 쓰기 위해 몇 가지 작은 실험을 시작할 수 있다.
사람은 예를 들어 쇼핑 욕구가 강하게 올라올 때, 바로 결제 버튼을 누르지 않고 “이것을 사지 않고도 내 욕망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사람은 화려한 여행 브이로그를 보고 당장 해외로 떠나지 못하더라도, 지금 있는 도시에서 새로운 길을 걸어 보는 실험을 할 수 있다. 이런 실천은 욕망의 에너지를 소비에서 경험과 생성으로 옮기는 연습이다.
또 사람은 자기계발 콘텐츠를 보다가 그 내용 중 단 하나만 골라 오늘 실천해 본 뒤, 더 이상 관련 영상을 보지 않는 실험을 할 수도 있다. 이 실험을 통해 사람은 ‘정보 소비’가 아니라 ‘행동 생성’에 욕망을 쓰는 감각을 익힌다. 들뢰즈의 언어로 말하자면, 욕망-기계는 이제 영상 재생 버튼만 누르는 기계가 아니라, 새로운 시도를 생산하는 기계가 된다.
들뢰즈가 던지는 질문 – ‘누가 나의 욕망을 설계하는가’
들뢰즈와 함께 과잉 정보 사회를 돌아보면, 한 가지 질문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지금 나의 욕망은 누가 설계하고 있는가?” 사람은 스스로를 욕망의 주인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에서는 플랫폼, 알고리즘, 광고, 타인의 시선이 욕망의 형태와 방향을 함께 만들고 있다. 들뢰즈 철학은 이 구조를 숨기지 말고 정면으로 바라보라고 말한다.
들뢰즈에게 욕망은 언제나 생산하는 힘이다. 이 힘은 어느 한쪽에 완전히 종속되지 않는다. 욕망은 포획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탈주를 시도하기도 한다. 과잉 정보 사회는 욕망을 포획하는 장치로 가득 차 있지만, 그 안에서도 욕망은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다. 사람은 이런 가능성을 믿고, 작은 균열과 실험을 통해 자신만의 방향을 만들어 갈 수 있다.
결론에서 필자는 들뢰즈가 현대인에게 전해 주는 메시지를 이렇게 정리하고 싶다. “너의 욕망은 결핍이 아니라 힘이다. 그 힘을 남이 설계한 회로에만 쓰지 말고, 너만의 리좀이 될 수 있는 곳에도 흘려보내라.” 사람은 이 메시지를 마음에 새기면서, 오늘 하루의 스크롤과 클릭을 조금 다른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들뢰즈와 함께 과잉 정보 사회에서 덜 휘둘리는 법
마무리에서는 지금 당장 실천해 볼 수 있는 몇 가지 간단한 제안을 들뢰즈 이름으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 사람은 하루에 단 10분이라도 “알고리즘 없는 시간”을 만들어 볼 수 있다. 사람은 이 시간 동안 검색창 대신 자신이 미리 적어 둔 관심 목록을 꺼내어, 그 목록을 따라 정보를 찾아가 본다. 이 10분은 작은 것이지만, 욕망이 스스로 길을 내는 연습이 된다.
둘째로 사람은 “욕망 일기”를 써 볼 수 있다. 사람은 하루 동안 강하게 끌렸던 콘텐츠나 물건, 사람이나 장소를 몇 가지 적어 보고, “이 욕망은 어디에서 온 것 같나?”, “이 욕망은 나에게 어떤 에너지를 주었나?”를 함께 기록한다. 이 작업은 들뢰즈식으로 말해 욕망-기계의 배선을 눈에 보이게 만드는 일이다. 사람은 이 배선을 볼수록, 무의식적인 복제 욕망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다.
셋째로 사람은 한 달에 한 번쯤 “정보 대청소”를 해 볼 수 있다. 사람은 구독 취소, 알림 해제, 팔로우 정리, 앱 삭제 같은 행동을 통해 자신의 디지털 리좀을 정비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사람은 “이 사람을, 이 채널을, 이 앱을 계속 연결해 둘 이유가 있는가?”를 묻는다. 이 질문은 정보뿐 아니라 욕망의 우선순위를 다시 짜는 작업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사람은 스스로에게 너무 큰 목표 대신 “들뢰즈식 작은 실험 하나”만을 매일 부탁해 볼 수 있다. 사람은 오늘 하루, 평소라면 넘길 만한 작은 호기심 하나를 붙잡고 직접 조사해 보거나, 직접 시도해 본다. 그렇게 사람들이 한 사람씩 자기 욕망의 실험자가 될 때, 과잉 정보 사회는 단순한 피로의 공간이 아니라, 각자의 생성이 교차하는 공간이 될 수 있다.
사람은 과잉 정보 속에서 지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들뢰즈는 지친 사람이 완전히 패배한 것이 아니라고 말해 준다. 들뢰즈는 지친 사람이야말로 “이대로는 안 되겠다”라는 감각을 통해 새로운 길을 찾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이 글이 독자에게 그런 새로운 길을 상상해 볼 작은 힘을 건넸다면, 들뢰즈와 과잉 정보 사회를 이어 본 이 시도는 이미 자기 역할을 다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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