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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들뢰즈 & 현대 사유

질 들뢰즈의 철학으로 본 ‘생성’ – 완성되지 않아도 괜찮은 이유

by 둥둥팍 2025. 12. 11.

부유하는 파편으로 형성되는 조각상을 상징한 이미지


들뢰즈 철학으로 이해하는 ‘생성’의 핵심

현대 사회는 사람에게 끊임없이 “빨리 완성된 사람이 되라”라고 요구한다. 사람들은 스펙, 커리어, 외모, 인간관계까지 모든 영역에서 어느 정도의 ‘완성형’을 기준으로 삼고 자신을 평가한다. 그러나 들뢰즈 철학은 이 전제를 정면에서 뒤흔든다. 들뢰즈는 인간과 세계를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되어 가는 것’, 즉 ‘생성’으로 이해한다. 이 글은 들뢰즈가 말하는 생성의 관점을 중심으로, “완성되지 않아도 괜찮다”라는 말이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충분히 철학적인 근거를 가진 태도라는 점을 설명한다.

이 글에서 필자는 들뢰즈 생성 철학을 일상에 밀착해서 풀어낸다. 필자는 전공서에 나오는 추상적인 설명 대신, 진로 고민, 늦은 시작, 커리어 전환, 관계의 변화처럼 사람들이 실제로 부딪히는 장면 속에서 생성 개념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독자는 들뢰즈가 말한 생성의 철학을 통해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됐다”, “나는 너무 늦었다”라는 자기 비난의 언어에서 벗어나, “나는 지금도 여전히 되어 가는 중이다”라는 새로운 문장을 자신의 삶에 적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들뢰즈가 알려주는 ‘완성 강박’에서 벗어나는 방법

사람은 성장 과정에서 늘 비슷한 말을 듣는다. 사람은 “빨리 진로를 정해야 한다”, “이제 나이도 있는데 슬슬 자리 잡아야 한다”, “언제까지 고민만 할 거냐” 같은 말을 들으며 자신이 아직 미완성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운 결함처럼 느낀다. 사람은 취업, 결혼, 내 집 마련, 경력 연차, 자격증 같은 기준을 보고 남들에 비해 얼마나 완성됐는지 가늠한다. SNS에서는 이미 성공한 사람들, 일찍 자기 길을 찾은 사람들, 혼자서도 충분히 잘 나아가는 사람들의 사진과 글이 끝도 없이 올라온다. 이런 환경 속에서 사람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견디기 점점 더 어려워한다.

그러나 들뢰즈 철학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들뢰즈는 애초에 “완성된 인간”이라는 목표가 의심스러운 개념이라고 말한다. 들뢰즈는 세계의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고 섞이고 새로 연결된다고 본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어제와 오늘이 같지 않고, 어릴 때와 지금이 같지 않고, 상황과 관계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들뢰즈는 사람을 하나의 단단한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계속해서 ‘되어 가는 존재’로 이해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완성되지 않았다”라는 말은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서론에서 필자는 먼저 들뢰즈가 왜 생성이라는 말에 집착했는지, 그리고 그 말이 현대인에게 왜 필요해졌는지 살펴본다. 필자는 특히 “늦게 시작한 사람들”, “자주 길을 바꾸는 사람들”, “아직 뭘 좋아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들뢰즈의 생성 철학에서 어떤 위로와 힌트를 얻을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사람은 이 글을 읽으면서, 지금 자신의 미완성 상태를 당장 사랑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예전만큼 미워하지는 않게 될 수 있다. 그 정도의 변화만 있어도 들뢰즈가 말한 생성의 철학은 이미 조용히 힘을 발휘한 것이다.

들뢰즈가 말하는 생성과 불완전함의 가치

1. 들뢰즈 철학의 시선으로 다시 보는 ‘완성’과 ‘생성’

1-1. 들뢰즈의 ‘존재’ 대신 ‘되기’: 결과보다 과정을 보는 시선

들뢰즈 철학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들뢰즈가 “무엇인가 ‘이다’(be)”보다 “무엇이 ‘되어 간다’(becoming)”를 더 중시했다는 점이다. 사람은 언어 습관 때문에 “나는 ~이다”라고 말하는 데 익숙하다. 사람은 “나는 디자이너이다”, “나는 내향적인 사람이다”, “나는 평범한 직장인이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편리하지만, 동시에 사람에게 자신을 하나의 고정된 결과로 보는 시선을 심어 준다. 들뢰즈는 이 고정된 시선을 흔들고 싶어 한다.

들뢰즈는 인간과 세계가 언제나 과정 속에 있다고 본다. 사람은 지금 이 순간에도 생각이 변하고, 감정이 흔들리고, 관계가 새로 생기거나 사라지고, 몸의 컨디션까지 달라진다. 같은 일을 반복하더라도, 사람은 이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반복하지 못한다. 사람의 경험과 상황이 항상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이런 ‘계속해서 달라짐’ 자체가 현실의 본모습이라고 본다. 이때 생성은 바로 이 달라짐의 방향과 흐름을 가리킨다.

이 관점에서 사람의 자기 이해도 달라진다. 사람은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 대신, “나는 지금 무엇이 되어 가고 있는가?”라고 물을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을 완성된 작품이 아니라, 계속 수정되는 초안으로 바라볼 수 있다. 이때 사람의 목표는 완전히 마감된 결과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자신에게 솔직한 방향으로 생성의 흐름을 이어 가는 것이다. 들뢰즈가 강조하는 생성의 관점은 결과 중심 사회에서 사람의 숨을 조금 덜 막히게 해 준다.

1-2. 들뢰즈의 ‘생성’과 고정된 자아 개념의 충돌

많은 심리학과 자기계발 담론은 사람에게 “진짜 나를 찾아라”라고 말한다. 사람은 이 말을 듣고, 어딘가에 고정된 ‘진짜 나’가 숨어 있고, 자신은 그걸 발견해야 한다고 믿는다. 사람은 이 진짜 나를 찾기 위해 성격 유형 검사를 하고, 명상 프로그램을 찾아보고, 자기 이해를 위한 책을 읽는다. 이런 시도들은 충분히 의미가 있지만, 동시에 사람을 또 다른 함정에 빠뜨릴 수도 있다.

들뢰즈 철학은 이 ‘진짜 나’라는 개념 자체를 의심한다. 들뢰즈는 인간을 하나의 중심 자아가 아니라, 다양한 힘과 관계가 뒤섞인 장으로 본다. 사람은 상황, 환경, 관계, 몸 상태에 따라 계속 다른 면을 드러낸다. 들뢰즈가 보기에는 ‘진짜 나’라는 것도 결국 특정한 순간에 우세했던 하나의 형태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들뢰즈는 사람에게 ‘진짜 나를 찾으라’고 말하기보다, ‘여러 가지 나가 생성되는 과정을 보라’고 말한다.

이 관점은 사람을 훨씬 자유롭게 만든다. 사람은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는 말 뒤에 숨어서 변화를 피하지 않아도 되고, 동시에 “나는 아직 진짜 나를 못 찾았어”라고 자책하지 않아도 된다. 사람은 지금 자신에게서 생성되고 있는 여러 방향을 인정하고, 그중에서 어떤 방향을 조금 더 키우고 싶은지 선택할 수 있다. 들뢰즈가 강조하는 생성의 자아는 단단한 본질이 아니라, 유연한 네트워크에 가깝다.

1-3. 들뢰즈가 말하는 생성과 일상의 작은 변화들

들뢰즈의 생성 개념은 거창한 인생 전환에서만 나타나지 않는다. 들뢰즈가 보기에는 일상의 매우 사소한 변화들도 모두 생성의 장면이다. 사람은 오늘 새로운 카페에 가 보기로 결정할 때, 평소에 잘 듣지 않던 음악 장르를 들어 볼 때,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운동을 시작할 때 이미 작은 생성의 흐름 속에 들어가 있다. 사람은 이런 선택들을 통해 자신이 미처 몰랐던 감각과 취향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우연히 글쓰기 모임을 따라갔다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능력에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또 다른 사람은 친구의 부탁으로 발표를 대신 나갔다가,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일이 생각보다 잘 맞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수 있다. 들뢰즈가 말하는 생성은 이런 순간들에서 조용히 시작된다. 시작은 작지만, 이런 작은 생성들이 쌓이면서 사람의 인생은 어느 순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열리기도 한다. 사람은 나중에서야 그 흐름을 돌아보고 “그때의 그 사소한 선택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라고 말한다.

들뢰즈 철학은 사람에게 이런 작은 변화들을 가볍게 보지 말라고 말한다. 사람은 완벽하게 준비된 큰 도약을 기다리느라 현재의 작은 생성을 놓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는 준비가 충분히 되었다고 느끼는 순간은 거의 오지 않는다. 들뢰즈가 강조하는 생성의 관점은 사람에게 “완벽하지 않아도, 준비가 덜 되어 있어도, 조금씩 움직여 보라”라고 권유한다. 그 작은 움직임이 바로 생성이다.

2. 들뢰즈 생성 철학으로 해석하는 불안, 실패, 늦어짐

2-1. 들뢰즈 관점에서 보는 ‘뒤처진 삶’이라는 환상

현대인은 ‘타임라인’에 민감하다. 사람은 또래의 연봉, 결혼 시기, 내 집 마련 연령, 승진 속도를 자연스럽게 비교한다. 사람은 SNS에서 누군가의 결혼 소식, 이직 소식, 해외 이민 스토리를 볼 때마다, 자신의 속도가 너무 느린 것은 아닌지 불안해한다. 사람은 어느 순간 “나는 인생에서 뒤처졌다”라는 문장을 마음속에 새긴다. 이 문장은 사람의 에너지를 빠르게 소모시킨다.

들뢰즈 철학은 이 ‘뒤처짐’이라는 개념을 비판적으로 본다. 들뢰즈가 보기에는 사람마다 생성의 리듬과 경로가 다르다. 어떤 사람은 한 분야에서 오래 머물며 깊이를 쌓는 생성의 방식을 택하고, 어떤 사람은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연결을 넓히는 생성의 방식을 택한다. 들뢰즈는 이 두 방식을 우열의 관계로 보지 않는다. 사람의 삶은 마치 리좀처럼, 여러 방향으로 뻗어 나가는 연결망일 뿐이다. 여기에서 “앞”과 “뒤”, “빠름”과 “느림”은 실제보다 과장된 감각이다.

들뢰즈의 생성 관점을 받아들이면, 사람은 자신의 속도에 대해 조금 관대해질 수 있다. 사람은 여전히 불안을 느낄 수 있지만, 적어도 그 불안을 절대적인 진실로 받아들이지는 않게 된다. 사람은 “나는 늦었다”라고 단정 짓는 대신, “나는 다른 경로로 생성되고 있다”라고 말해 볼 수 있다. 이 문장은 현실 문제를 지워 주지는 않지만, 사람의 시선을 절망에서 가능성 쪽으로 조금 옮겨 준다.

2-2. 들뢰즈와 실패: 생성의 정지점이 아니라 분기점

실패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끝’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사람은 시험에 떨어졌을 때, 공모전에 낙방했을 때, 사업이 망했을 때, 연애가 끝났을 때 “여기까지인가 보다”라는 생각을 한다. 사람은 실패를 끝으로 보기에, 실패 이후의 자신을 상상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기 쉽다. 이때 들뢰즈의 생성 철학은 실패에 대해 다른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들뢰즈가 보기에는 사람의 삶은 하나의 직선이 아니라 여러 갈래로 분기하는 선이다. 생성은 항상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튼다. 실패는 직선이 끊어지는 지점이 아니라, 방향이 갈라지는 지점이다.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준비한 시험에 떨어졌다면, 그 실패는 한 경로가 닫힌 사건인 동시에 다른 경로가 열릴 수 있는 계기이기도 하다. 사람은 실패를 통해 자신이 진짜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 어떤 환경에서 더 잘 버티는지를 알게 된다. 이 정보들은 다음 선택에서 소중한 자원이 된다.

들뢰즈 생성 철학의 관점에서 실패는 ‘생성의 정지’가 아니다. 오히려 실패는 생성이 새로운 모양으로 다시 짜이는 순간이다. 물론 이 순간은 고통스럽다. 사람은 실망과 자기비난, 두려움 속에서 쉽게 숨이 막힌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흘렀을 때, 사람은 실패를 단순한 끝이 아니라 하나의 분기점으로 기억할 수 있다. 사람은 “그 일이 잘됐으면 좋았겠지만, 잘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생겼다”라고 말할 수 있다. 들뢰즈가 말하는 생성의 관점은 실패를 과장해서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실패를 단순한 파괴로만 보지 않는 균형을 제공한다.

2-3. 들뢰즈가 알려주는 ‘비교’에서 벗어나는 생성의 태도

비교는 완성 강박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사람은 남의 이력서를 보고, 남의 연애 스토리를 듣고, 남의 집과 자동차를 보면서 자신이 얼마나 뒤처졌는지 계산한다. 사람은 자신과 남을 같은 기준선 위에 세워 놓고 누가 더 완성에 가까운지 평가한다. 이때 기준은 보통 나이가 된다. 사람은 “서른이면 이 정도는 되어 있어야지”, “마흔이면 안정됐어야지” 같은 말을 자연스럽게 주고받는다.

들뢰즈 철학은 이런 비교의 사고방식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들뢰즈는 존재를 단일한 스케일 위에서 수직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들뢰즈는 존재들의 차이를 서열이 아니라 다양성으로 본다. 사람마다 생성의 방향, 속도, 방식, 환경이 모두 다르다. 어떤 사람은 도시에서, 어떤 사람은 시골에서, 어떤 사람은 혼자서, 어떤 사람은 가족과 함께 생성의 과정을 겪는다. 이런 조건들을 무시하고 단순한 결과만 놓고 비교하는 일은, 들뢰즈식으로 말해서 현실을 지나치게 평면화하는 일이다.

들뢰즈의 생성 철학을 삶에 적용하면, 사람은 비교가 자연스럽게 줄어든다. 사람은 남의 인생을 “저건 저 사람의 생성 방식”이라고 이해한다. 사람은 남의 길을 부러워하거나 폄하하기보다, 자신의 생성이 진행되는 구체적인 자리와 조건에 더 집중할 수 있다. 비교가 사라지는 것은 어렵지만, 비교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지 않는 일은 가능하다. 들뢰즈는 바로 그 지점을 향해 사람의 시선을 돌려준다.

3. 들뢰즈의 ‘생성’을 일상에 적용하는 실천 전략

3-1. 들뢰즈가 말하는 ‘작은 생성’부터 시작하기

많은 사람은 인생을 바꾸기 위해서 거대한 결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퇴사를 하거나, 이민을 가거나, 전혀 다른 전공으로 재입학을 하는 식의 큰 전환만을 상상한다. 그러나 들뢰즈의 관점에서 생성은 반드시 그렇게 극적인 사건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들뢰즈는 생성이 오히려 아주 섬세한 수준에서 시작된다고 본다.

사람은 오늘 하루의 루틴에서 하나만 바꿔 보는 것으로도 생성의 연습을 할 수 있다. 사람은 늘 가던 길 대신 다른 길로 다녀와 볼 수 있고, 퇴근 후 누워만 있던 시간에 10분만 기록을 해 볼 수도 있다. 사람은 늘 같은 사람만 만나던 패턴에서 조금 벗어나, 오래 연락하지 않았던 지인에게 안부를 보내 볼 수도 있다. 이런 변화들은 너무 사소해서 의미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새로운 감각과 생각을 불러오는 계기가 된다.

들뢰즈 생성 철학을 적용할 때 중요한 점은 사람의 목표가 “엄청난 변신”이 아니라 “조금 다른 나”라는 것이다. 사람은 하루에 1mm라도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다. 사람이 이런 작은 생성들을 꾸준히 쌓아 가면, 어느 순간 멀리 돌아봤을 때 지금의 자리와 예전의 자리가 꽤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 사람은 깨닫는다. 거대한 도약을 한 번 한 것이 아니라, 작은 생성을 오랫동안 이어 왔다는 사실을.

3-2. 커리어와 들뢰즈: 한 직업이 아니라 여러 생성의 경로 설계하기

커리어 영역에서 들뢰즈의 생성 철학은 특히 유용하다. 사람은 여전히 한 번 정한 직업을 평생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사람은 전공을 바꾸거나 업계를 바꾸거나 포지션을 이동할 때, “나는 너무 자주 갈팡질팡 하는 건 아닐까”라는 불안을 느낀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한 사람이 평생 한 분야에만 머무는 경우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기술 변화, 산업 구조의 재편, 경기 상황 등 여러 요소가 사람의 커리어 경로를 끊임없이 흔든다.

들뢰즈의 생성 철학은 이런 변화를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받아들이도록 도와준다. 들뢰즈 관점에서 커리어는 하나의 직선 경력이 아니라, 여러 생성의 경로가 얽힌 지도이다. 사람은 첫 직장에서 배운 경험을 두 번째 직장에서 다른 방식으로 쓰고,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취미가 나중에 중요한 업무 역량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글쓰기를 좋아하는 개발자는 기술 블로그를 통해 자신만의 위치를 만들 수 있고, 디자인에 관심 있는 마케터는 기획과 디자인 사이를 오가는 새로운 역할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사람은 커리어를 설계할 때 “나는 어떤 직업이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 대신, “나는 어떤 능력과 감각이 생성되기를 원하는가?”라고 물어볼 수 있다. 사람은 문제 해결 능력, 공감 능력, 기획력, 설득력, 창의적 연결 능력 같은 생성의 방향을 잡고, 그것을 다양한 직업과 프로젝트에서 실험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사람은 한 가지 직업에 자신을 가두지 않고, 여러 생성의 경로를 열어 둔 채 커리어를 설계할 수 있다.

3-3. 관계와 들뢰즈: 사람 사이에서 계속 달라지는 나를 허용하기

사람은 인간관계 안에서도 ‘완성된 나’를 유지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낀다. 사람은 연애 관계에서 항상 성숙한 파트너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가족 안에서는 늘 책임감 있는 자녀 혹은 부모여야 한다고 믿는다. 사람은 친구 사이에서는 언제나 유쾌한 사람으로 남아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은 관계에 따라, 상황에 따라, 시기에 따라 계속 달라진다.

들뢰즈의 생성 철학은 관계 속의 이 변화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정한다. 들뢰즈가 보기에는 관계 역시 생성의 장이다. 사람은 어떤 사람과 함께 있을 때 특정한 면이 더 강하게 드러나고, 다른 관계에서는 또 다른 면이 살아난다. 사람은 연애를 통해 자신이 애정 표현을 어떻게 하는 사람인지 새롭게 알게 되고, 직장 동료와의 갈등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방어적인 사람인지 깨닫기도 한다. 이런 모든 과정은 사람이 다른 방식으로 생성되는 상황들이다.

사람은 관계에서 달라지는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사람은 “예전에는 이랬는데, 요즘 나는 좀 다르다”라는 변화를 인정할 수 있다. 사람은 오래된 친구들에게 “요즘 나는 이런 부분에서 많이 달라졌어”라고 솔직히 말할 수 있다. 들뢰즈의 관점에서 관계는 나를 하나의 형태로 고정시키는 틀이 아니라, 여러 가지 나를 생성시키는 실험실이다. 사람은 이 실험실에서 실패하고, 상처받고, 다시 시도하면서 자신만의 관계 감각을 만들어 간다.

3-4. 들뢰즈 철학을 활용한 나만의 느슨한 성장 계획 세우기

들뢰즈의 생성 철학을 안다고 해서 사람이 계획 없이 살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들뢰즈의 관점을 적용하면, 사람은 더 현실적인 방식으로 성장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사람은 세부 목표를 지나치게 딱 잘라 정하는 대신, 방향과 여지를 동시에 담은 느슨한 계획을 설계할 수 있다.

사람은 먼저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싶나?”라는 질문을 적어 볼 수 있다. 사람은 “나는 더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더 유연한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진 사람이 되고 싶다”처럼 방향을 설정할 수 있다. 그 다음에 사람은 이 방향과 연결된 구체적인 실험들을 3~4개 정도 적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공감 능력을 키우고 싶은 사람은 상담 관련 책을 읽거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모임에 참여하거나, 자신의 감정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하는 실천을 해 볼 수 있다.

들뢰즈 생성 철학을 활용한 계획의 핵심은 계획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애초부터 인정하는 것이다. 사람은 3개월 뒤, 6개월 뒤에 자신의 상태를 다시 점검하고, 방향을 조금 수정해도 괜찮다는 전제를 깔고 시작한다. 사람은 계획이 바뀌었다고 해서 자신을 “의지 박약”이라고 평가하지 않는다. 사람은 “내 생성의 방향이 달라지고 있구나”라고 이해한다. 이렇게 사람은 계획조차 생성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다.

들뢰즈가 전하는 ‘미완성의 용기’

이 글은 들뢰즈 철학의 핵심 개념인 ‘생성’을 중심으로, “완성되지 않아도 괜찮다”라는 말이 왜 단순한 위로가 아닌지를 살펴보았다. 들뢰즈는 인간과 세계를 언제나 진행형으로 이해했다. 들뢰즈가 보기에 사람은 이미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연결되고 방향을 바꾸는 리좀적 존재이다. 들뢰즈는 사람에게 “너는 아직도 계속 되어 가는 중”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어쩌면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가장 따뜻한 위로이기도 하다.

완성 강박이 강한 시대에, 들뢰즈 생성 철학은 사람에게 미완성의 용기를 건넨다. 사람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을 수 있고, 아직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을 찾지 못했을 수 있다. 사람은 진로를 여러 번 바꾸었고, 관계에서 여러 번 다쳤고, 계획했던 인생 루트에서 비껴나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들뢰즈의 관점에서 이런 상태는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여전히 생성이 진행 중이라는 징후이다.

물론 생성의 삶은 불안을 동반한다. 사람은 언제나 “이 길이 맞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하지만 들뢰즈는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너는 아직도 다른 것이 될 수 있다.”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사람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자유를 가진다. 그 자유는 동시에 책임이기도 하지만, 그 책임은 완성된 결과를 증명하라는 압박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진지하게 생성에 참여하라는 초대이다.

들뢰즈 생성 철학, 오늘 당장 써먹는 방법

글의 마지막에서 필자는 들뢰즈의 생성 철학을 오늘 바로 적용해 볼 수 있는 간단한 실천 몇 가지를 제안하고 싶다. 첫째로 사람은 자기소개 문장을 한 번 바꿔 볼 수 있다. 사람은 “나는 ~~이다” 대신 “나는 지금 ~~가 되어 가는 중이다”라고 말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프리랜서 디자이너이다” 대신 “나는 지금 내가 좋아하는 이미지를 찾고, 그걸로 먹고 사는 방법을 실험하는 중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 한 문장 변화만으로도 사람의 시선은 결과에서 과정으로 옮겨진다.

둘째로 사람은 오늘 하루가 끝날 때, “오늘 나는 어떤 작은 생성 하나를 만들었는가?”를 떠올려 볼 수 있다. 사람은 새로운 것 하나를 시도했는지, 익숙한 일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해 봤는지, 누군가와의 대화에서 이전과 다른 말을 해 봤는지 돌아볼 수 있다. 사람이 이런 작은 생성들을 의식하기 시작하면, 사람의 삶은 이미 조금 다른 궤도 위에 올라간다.

셋째로 사람은 스스로를 평가하는 말을 조심스럽게 바꿔 볼 수 있다. 사람은 “나는 아직도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을 자주 떠올릴 때마다, “나는 아직도 여러 가능성 사이에서 생성되는 중이다”라는 문장을 대신 꺼내 볼 수 있다. 이 문장은 현실을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에게 최소한의 신뢰를 남긴다. 들뢰즈의 생성 철학은 결국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완성되지 않았다는 말은 아직 늦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깨달음을 기억하는 한, 사람은 자신의 미완성을 조금 더 부드럽게 안아 줄 수 있다.

들뢰즈는 누구에게도 완성된 인간이 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들뢰즈는 오히려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생성의 리듬을 찾기를 바랐다고 볼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오늘 단 한 가지라도 새로운 시도를 해 보고, 자신의 미완성에 대해 조금 덜 미안해하게 되었다면, 그 자체로 들뢰즈의 생성 철학은 이미 조용히 성공한 셈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