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뢰즈와 『안티 오이디푸스』로 다시 읽는 현대 가족
현대 사회에서 가족 구조는 빠르게 변하고 있다. 사람은 더 이상 ‘아버지-어머니-자녀’라는 전형적인 핵가족만을 가족이라고 부르기 어렵다. 한부모 가족, 재혼 가족, 비혼·동거 가구, 1인 가구, 조부모와 손주가 함께 사는 집, 심지어 혈연이 전혀 없는 친구들끼리의 동거까지, 가족의 형태는 눈에 띄게 다양해졌다. 하지만 법, 제도, 심리 상담,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 속 가족 이미지는 여전히 오래된 핵가족 모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공저 『안티 오이디푸스』는 이런 현실을 비틀어 볼 수 있는 강력한 철학적 도구를 제공한다. 이 책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중심 가족 모델을 비판하고, 욕망이 가족이라는 작은 틀을 훨씬 넘어 사회 전체, 자본주의 기계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들뢰즈의 시각을 빌릴 때, 오늘날의 가족은 어떤 모습으로 다시 읽힐까? 사람은 ‘정상 가족’이라는 말이 여전히 의미가 있는지, 혹은 새롭게 정의되어야 하는지를 다시 질문하게 된다.
이 글에서 필자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를 현대 가족 구조에 적용해 보는 상상 실험을 시도한다. 필자는 이 책을 이론서로만 다루지 않고, 실제 가족 갈등, 돌봄 노동, 부모와 자녀 사이의 긴장, 그리고 혈연을 넘어선 새로운 공동체 관계에 연결해 설명하려 한다. 사람은 이 글을 통해 “우리 가족은 정상이 아니야”라는 자기비난 대신, “우리 가족은 어떤 욕망-기계로 작동하고 있을까?”라는 다른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들뢰즈, 가타리, 오이디푸스 가족 로맨스의 해체
사람은 오랫동안 가족을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사람은 “가족이니까”, “피는 물보다 진하니까” 같은 문장을 반복하며, 가족이라는 단위를 특별한 사랑과 유대의 공간으로 이상화해 왔다. 물론 가족은 실제로도 많은 사람에게 안전과 지지, 돌봄을 제공하는 중요한 공간이다. 그러나 동시에 가족은 누군가에게 폭력, 통제, 강요, 죄책감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사람은 “그래도 가족인데”라는 말 한마디에 자신이 겪는 고통을 말하지 못한 채 삼키곤 한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이 가족 안의 긴장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틀로 설명했다. 프로이트는 어린아이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향한 욕망과 경쟁, 동일시의 과정을 거치면서 사회적 주체로 성장한다고 보았다. 이 모델에서 가족은 아버지-어머니-자녀로 이루어진 핵가족이 기본이며, 그 구조가 마치 인간 정신의 ‘정상 경로’처럼 간주된다. 이 틀 안에서 사람의 욕망은 우선 가족 안에서 해석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이 전제를 정면으로 뒤흔든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사람의 욕망을 작은 가족 연극 속으로 가두지 말라고 말한다. 들뢰즈에게 욕망은 가족 이전에 이미 사회, 역사, 경제, 정치와 얽혀 있는 흐름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정신분석이 오이디푸스라는 작은 틀을 통해 모든 것을 해석할 때, 정신 분석은 체제에 순응하는 도구가 된다”라고 비판한다. 이 비판은 오늘날 가족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서론에서 필자는 먼저 사람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정상 가족’ 상을 들뢰즈적 시선으로 흔들어 본다. 사람은 가족을 자연스러운 단위가 아니라,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배치로 다시 볼 수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배치를 해체하면서, 가족이 욕망을 가두는 감옥이 아니라 서로 다른 욕망-기계들이 접속하는 하나의 장이 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이 제안은 오늘날의 다양한 가족 형태를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넓혀 준다.
들뢰즈와 『안티 오이디푸스』를 통해 본 현대 가족 구조 해석
1. 프로이트적 가족 모델과 들뢰즈‧가타리의 비판
1-1.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핵가족 모델의 전제
들뢰즈와 가타리가 비판하는 핵심 대상은 프로이트가 세운 오이디푸스 중심 정신분석 모델이다. 사람은 이 모델에서 아버지, 어머니, 자녀가 욕망과 금지를 둘러싼 삼각관계를 이룬다고 배운다. 아버지는 법과 권위를 상징하고, 어머니는 사랑과 욕망의 대상이 되며, 자녀는 이 둘 사이에서 갈등과 동일시를 겪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 구조는 핵가족을 인간 정신의 기본 무대로 설정한다.
이 틀 안에서 문제는 자연스럽게 ‘가족 내부의 갈등’으로 환원된다. 사람은 우울, 불안, 중독, 강박 등 다양한 문제를 겪을 때, 우선 가족 관계에서 원인을 찾으려 한다. 물론 많은 경우 가족 경험이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들뢰즈는 이런 방식이 욕망을 지나치게 가족 안으로만 돌려보게 만든다고 본다. 사람의 욕망은 회사, 학교, 국가, 미디어, 자본주의 시스템과도 얽혀 있음에도, 오이디푸스 모델은 이 복잡한 연결을 잘 보지 못하게 만든다.
핵가족 모델은 또 한 가지를 자연스럽게 전제한다. 사람은 ‘정상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특정 형식을 이상화한다. 사람은 경제적으로 안정된 이성 부부와 자녀로 구성된 집을 기준점으로 삼고, 나머지 가족 형태들을 모두 ‘정상에서 벗어난 것’으로 느끼게 된다. 이 구도에서 한부모 가족, 재혼 가족, 비혼 동거, 1인 가구는 언제나 설명과 변명을 요구받는 위치로 밀려난다.
1-2. 들뢰즈와 가타리의 욕망-기계 개념으로 본 가족
들뢰즈와 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욕망을 “욕망-기계”라는 이미지로 설명한다. 욕망-기계는 끊임없이 무언가와 접속하고 생산하는 힘이다. 사람의 욕망은 단순히 누군가를 소유하고 싶은 감정보다, 새로운 관계와 사물, 의미를 만들어 내는 생산 에너지에 가깝다. 들뢰즈에게 욕망은 언제나 외부와 연결되고 흐르려는 성질을 가진다.
이 관점에서 가족은 닫힌 방이 아니다. 가족은 각각의 욕망-기계들이 서로 연결되고, 동시에 사회적・경제적 기계와도 접속되는 하나의 장이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면서도 회사, 노동, 돈의 논리에 연결된 욕망-기계이고, 자녀는 부모의 기대를 받으면서도 학교, 친구, 온라인 문화와 연결된 욕망-기계이다. 가족은 이 다양한 기계들이 서로 엮여 돌아가는 복합 장치에 가깝다.
들뢰즈 시각에서 가족 문제는 “누가 누구를 얼마나 사랑하느냐”의 문제만이 아니다. 가족 문제는 “이 집 안에서 어떤 욕망-기계가 어떻게 접속되거나 차단되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신의 좌절을 자녀의 성취를 통해 보상하려 할 때, 부모의 욕망-기계는 자녀라는 기계에 과도하게 접속한다. 이때 자녀는 자신의 욕망을 느끼기도 전에 부모 욕망의 연장선이 되기 쉽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런 상황을 오이디푸스로 설명하기보다, 욕망-기계들 사이의 잘못된 배선으로 설명하려 한다.
1-3. 들뢰즈의 탈영토화로 다시 보는 가족의 경계
들뢰즈 철학에서 탈영토화는 기존의 경계와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움직임을 말한다. 가족이라는 “영토”도 예외가 아니다. 사람은 오랫동안 가족을 국가와 사회의 가장 작은 단위, 안정과 재생산의 기지로 간주해 왔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는 가족이 자본주의의 요구에 따라 특정 방식으로 재편된 결과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탈영토화의 관점에서 보면, 현대 가족은 이미 오래전부터 변하고 있었다. 농경 사회의 대가족은 도시화와 산업화를 거치며 핵가족으로 축소되었고, 핵가족은 다시 다양한 형태의 혼합 구조로 변화하고 있다. 들뢰즈는 이 변화를 단순히 “가족이 무너진다”라고 보지 않는다. 들뢰즈는 이 변화를 욕망-기계들이 다른 방식으로 서로 연결되고 분리되는 과정으로 읽는다.
예를 들어, 1인 가구의 증가는 “이기적인 개인이 늘어났다”라는 도덕적 진단보다, 가족이라는 영토에서 욕망이 부분적으로 탈영토화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사람은 더 이상 혈연 가족 안에서만 소속감을 찾지 않고, 친구, 동료, 온라인 커뮤니티, 취미 모임 등 다양한 접속점을 통해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한다. 들뢰즈는 이 과정을 위기이자 가능성으로 동시에 본다. 이 가능성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가 현대 가족 논의의 과제가 된다.
2. 들뢰즈 『안티 오이디푸스』와 현대 가족 형태의 재해석
2-1. 들뢰즈 시각에서 본 한부모·재혼·확장 가족
한부모 가족, 재혼 가족, 조부모가 주양육자가 되는 가족은 종종 ‘결핍된 가족’으로 불리곤 한다. 사람은 이 가족들을 “아버지가 없는 집”, “어머니가 없는 집”, “정상적인 부모 조합이 아닌 집”으로 설명하려 한다. 이 설명 방식에는 핵가족을 기준으로 삼는 오이디푸스적 시선이 숨어 있다.
들뢰즈 시각에서 이런 가족들은 다른 방식으로 구성된 욕망-기계의 배치이다. 한부모 가정에서는 부모와 자녀가 경제・감정・생활 영역에서 더 긴밀하게 접속할 수 있고, 동시에 부담도 집중될 수 있다. 재혼 가족에서는 새로운 어른과 아이들 사이에 아직 정해지지 않은 관계의 선들이 생긴다. 이 선들은 갈등의 잠재력과 동시에 새로운 지지망의 가능성을 함께 품고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가족을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배치로 보자고 제안한다. 이 관점에서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이 가족은 어떤 역할과 감정, 책임이 어떤 방향으로 흐르도록 조직되어 있는가?” 사람은 부모 수가 둘인지 하나인지보다, 욕망-기계들이 서로 억압과 통제의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혹은 돌봄과 성장의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더 중요한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2-2. 들뢰즈와 가타리로 읽는 비혼·1인 가구의 가족성
비혼과 1인 가구는 흔히 “가족 밖에 있는 삶”처럼 이야기된다. 그러나 실제로 비혼자와 1인 가구도 풍부한 관계망 속에서 살아간다. 사람은 직장 동료, 친구, 연인, 동거인, 반려동물, 온라인 커뮤니티와 다양한 방식으로 접속하며 자신의 욕망-기계를 운영한다. 들뢰즈 시각에서 이 관계망은 이미 또 다른 형태의 가족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혈연 중심 가족 모델이 욕망을 특정한 형태로만 승인하게 만드는 문제를 지적한다. 비혼과 1인 가구의 증가를 들뢰즈적으로 읽으면, 욕망이 전통적 가족 영토에서 탈영토화되어 새로운 공동체 모델을 실험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물론 현실에서는 비혼과 1인 가구가 여전히 제도적・경제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놓여 있다. 들뢰즈적 관점은 이 취약함을 개인의 선택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이 관점은 사회가 여전히 ‘결혼한 핵가족’을 표준으로 삼고 정책과 제도를 설계하는 배치를 비판한다. 되묻자면, 사람은 “왜 어떤 형태의 가족만 보호받고, 다른 가족성은 보호받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2-3. 온라인 커뮤니티와 ‘비혈연 가족’의 들뢰즈적 의미
오늘날 사람은 온라인에서 새로운 형태의 ‘비혈연 가족’을 경험한다. 사람은 팬덤, 게임 길드, 동호회, 커뮤니티에서 서로를 “우리”라고 부르며 지지하고 싸우고 성장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실제 가족보다 온라인 친구들이 더 깊은 이해와 정서적 지지를 제공하기도 한다.
들뢰즈 시각에서 이런 공동체는 욕망-기계들의 다른 접속 방식이다. 사람은 혈연이나 법적 관계가 아니더라도, 공통의 관심과 언어, 리듬을 공유하며 새로운 가족성을 만든다. 이 과정은 가족이라는 영토가 디지털과 오프라인을 가로질러 재구성되는 탈영토화의 한 장면이다.
물론 온라인 비혈연 가족에는 위험과 취약성도 함께 존재한다. 그러나 들뢰즈는 위험이 있다고 해서 새로운 되기의 가능성을 전면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들뢰즈는 이런 공간에서 욕망이 어떻게 조직되고, 누가 권력을 쥐고, 어떤 규범이 만들어지는지를 더 치열하게 분석하라고 제안한다. 이 분석을 통해 사람은 혈연 가족과 비혈연 가족 모두를 더 안전하고 창조적인 욕망-기계로 설계할 수 있다.
3. 들뢰즈 철학으로 재구성하는 가족 안의 권력, 돌봄, 상처
3-1. 들뢰즈 욕망-기계로 재해석하는 부모의 자리
전통적인 가족 담론에서 부모는 자녀를 위해 희생하는 존재로 이상화된다. 부모는 자신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녀에게 헌신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들뢰즈 시각에서 부모도 하나의 욕망-기계이다. 부모는 자신의 욕망을 단순히 지워버릴 수 없고, 자신이 겪은 결핍과 상처, 꿈과 좌절을 자녀와의 관계 속에서 다시 반복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려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부모의 욕망을 죄로 취급하기보다, 욕망의 흐름을 명확히 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부모는 “나는 자녀를 위해서”라는 명분 뒤에 숨지 않고, “나는 자녀를 통해 무엇을 보상받고 싶어 하는가?”, “나는 어떤 불안을 자녀의 성공과 성취로 덮으려 하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다. 이 질문은 부모에게 죄책감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욕망-기계의 배선을 조금 더 정직하게 보는 실천이다.
부모가 자신의 욕망을 인식할 때, 자녀의 욕망은 비로소 자신만의 목소리를 낼 공간을 확보한다. 들뢰즈 시각에서 건강한 가족은 욕망이 없는 가족이 아니라, 서로의 욕망이 어디에서 접속하고 어디에서 분리되는지 투명하게 말할 수 있는 가족이다. 이 투명성이 부모의 자리와 자녀의 자리를 더 안전하게 만들어 준다.
3-2. 들뢰즈가 말하는 자녀·청소년의 되기와 저항
자녀와 청소년은 가족 안에서 거의 항상 “길러야 할 존재”로만 취급된다. 사람은 아이에게 “너는 아직 모르니까”, “부모 말을 믿어라”라고 말하며 보호와 통제를 동시에 가한다. 그러나 들뢰즈가 강조하는 되기 개념을 떠올리면, 자녀와 청소년은 이미 중요한 되기의 주체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소수적 되기를 이야기할 때, 어린이와 청소년의 감각을 자주 언급한다. 아이와 청소년은 아직 체제의 규범을 완전히 내면화하지 않았기에,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느끼고 상상할 수 있다. 이 다른 감각은 때로 부모 세대에게 “문제 행동”이나 “반항”처럼 보인다. 그러나 들뢰즈 관점에서 이 반항은 새로운 되기의 언어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자녀가 “나는 꼭 결혼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회사원이 아닌 삶도 궁금하다”라고 말할 때, 부모는 불안과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한 무책임이나 미숙함이 아니라, 가족과 사회가 당연하다고 여겨온 영토를 의심하는 탈영토화의 표현이다. 들뢰즈는 이런 표현을 억누르기보다, 진지하게 듣고 함께 토론해야 할 질문으로 본다.
3-3. 들뢰즈식 가족 치유: 말하기, 배치 바꾸기, 함께 되기
가족 치유를 이야기할 때 사람은 흔히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자”라는 말로 결론을 내리곤 한다. 그러나 들뢰즈적 관점에서 치유는 감정의 화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치유는 욕망-기계의 배치를 실제로 바꾸는 작업을 포함해야 한다.
첫째로, 사람은 말하기가 필요하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정신분석의 오이디푸스적 해석에 반대했지만, 욕망을 말하는 행위 자체는 중요하게 본다. 가족 구성원은 각자 “나는 이 집에서 무엇이 좋았고, 무엇이 힘들었는지”, “나는 앞으로 어떤 관계를 만들고 싶은지”를 말할 공간을 가져야 한다. 이때 말은 누구의 잘잘못을 가르는 재판장이 아니라, 욕망의 흐름을 서로 보여주는 창이 된다.
둘째로, 배치 바꾸기가 필요하다. 사람이 아무리 솔직하게 말하더라도, 생활 구조가 그대로라면 오래된 패턴은 쉽게 돌아온다. 가족은 집안일 분담, 경제적 결정 구조, 함께 보내는 시간의 양과 질을 조정해 볼 수 있다. 작은 것부터 시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부모가 늘 자녀의 공부만 묻던 대화 패턴을 바꾸어, 자녀의 감정과 관심사에 대한 질문을 늘릴 수 있다. 이런 변경은 욕망-기계의 연결 구조를 실제로 바꾸는 일이다.
셋째로, 함께 되기가 필요하다. 들뢰즈에게 되기는 항상 ‘함께’ 일어난다. família 구성원은 서로를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여전히 되어 가는 중인 존재”로 볼 수 있다. 사람은 부모에게도 실수와 후회, 미완성의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자녀에게도 변화의 시간과 시행착오를 허용해야 한다. 이 상호 인정이 있을 때, 가족은 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는 오이디푸스 연극을 멈추고, 함께 변하는 되기-가족이 될 수 있다.
들뢰즈와 『안티 오이디푸스』가 열어 주는 ‘가족 이후’의 상상력
들뢰즈와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를 현대 가족 구조에 적용해 살펴보면, 사람은 가족을 더 이상 하나의 정답으로 볼 수 없게 된다. 들뢰즈는 가족을 욕망의 시작과 끝이 되는 신성한 공간으로 보지 않는다. 들뢰즈는 가족을 다양한 욕망-기계가 연결되는 하나의 배치로 본다. 이 배치는 시대와 환경, 제도와 기술에 따라 계속 바뀐다.
이 관점에서 ‘정상 가족’이라는 말은 설득력을 잃는다. 중요한 것은 형태가 아니라 작동 방식이다. 들뢰즈적 관점에서 사람은 “이 가족이 핵가족인가, 한부모 가족인가, 재혼 가족인가”보다, “이 가족 안에서 욕망이 어떻게 흐르고, 누가 침묵하고, 누가 과도한 책임을 지는가”를 묻는다. 이 질문은 가족을 평가하는 기준을 바꾸고, 다양한 가족 형태를 이해하고 존중할 가능성을 넓힌다.
『안티 오이디푸스』는 현대 가족에게 불편한 질문도 던진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가족은 언제 체제를 재생산하는 도구가 되는가?”, “가족은 언제 자녀의 상상력과 되기를 가로막는가?”를 묻는다. 이 질문은 가족을 해체하자는 주장이 아니라, 가족이 욕망을 억압하는 오이디푸스의 무대가 아닌, 새로운 되기가 피어날 수 있는 장이 되게 하자는 요청이다.
결론적으로, 들뢰즈와 『안티 오이디푸스』는 사람에게 가족을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운명”이 아니라, “함께 설계하고 수정할 수 있는 배치”로 보라고 제안한다. 사람은 이 제안을 통해, 자신의 가족이 완벽하지 않아도, 심지어 전형적인 형태가 아니더라도, 여전히 새로운 관계와 삶을 실험할 수 있는 공간임을 깨달을 수 있다.
들뢰즈 철학으로 오늘 우리 가족을 돌아보는 작은 연습들
마지막으로, 들뢰즈와 『안티 오이디푸스』의 관점을 오늘 자신의 가족에 적용해 볼 수 있는 작은 연습 몇 가지를 제안하고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 연습들은 거창한 이론 공부보다, 지금 여기에서 가족과 자신을 다르게 바라보는 시도를 돕기 위한 것이다.
첫째로, 사람은 자신의 가족을 떠올리며 “우리 집의 욕망-기계들은 어디에 가장 많이 접속해 있는가?”를 적어 볼 수 있다. 사람은 돈, 성적, 체면, 종교, 안정, 성공, 안전 등 다양한 키워드를 떠올리고, 가족 대화 주제와 갈등이 무엇을 중심으로 돌아가는지 살펴볼 수 있다. 이 작업은 가족 문제를 단순한 성격 차이가 아니라, 욕망의 구조로 보는 연습이다.
둘째로, 사람은 “나는 이 가족 안에서 어떤 역할 기계로 작동해 왔는가?”를 질문할 수 있다. 사람은 늘 웃으며 분위기를 풀어 왔는지, 늘 중재자였는지, 늘 말을 삼키는 사람인지 돌아볼 수 있다. 이때 사람은 스스로에게 “이 역할을 앞으로도 계속 유지하고 싶은가, 아니면 조금 바꾸고 싶은가?”를 묻는다. 이 질문은 소수적 되기의 출발점이다.
셋째로, 사람은 가족 구성원 한 명을 골라 “이 사람도 하나의 욕망-기계다”라고 마음속으로 말해 볼 수 있다. 사람은 그 사람이 어떤 두려움과 소망, 상처와 꿈을 가지고 있는지 상상해 보고, 가능하다면 조심스럽게 물어볼 수 있다. 이 시도는 “엄마니까, 아빠니까, 자식이니까”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한 사람의 되기를 보는 연습이다.
넷째로, 사람은 혈연 가족 밖에서도 자신에게 힘이 되는 ‘비혈연 가족’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사람은 친구, 동료, 온라인 커뮤니티, 멘토, 선생님, 후배 등 자신에게 지속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볼 수 있다. 이 이름들은 이미 또 다른 형태의 가족을 이루고 있다. 들뢰즈적 관점에서 이 인연들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가족 영토를 확장하는 탈영토화의 간단한 실천이다.
사람은 완벽한 가족을 만들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은 덜 억압적이고 덜 폭력적인 가족, 더 유연하고 더 서로의 되기를 지지하는 가족을 만들 수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는 그 길을 향해 불편하지만 필요한 질문을 던져 준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오늘 단 한 가지 질문이라도 자신의 가족에 적용해 본다면, 이미 작은 들뢰즈식 실험이 시작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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