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뢰즈 철학으로 다시 보는 ‘정체성’의 문제
현대 사회는 사람에게 끊임없이 “너는 누구냐”라고 묻는다. 사람들은 이력서, 자기소개서, SNS 프로필까지 모든 플랫폼에서 단단한 한 줄 정의로 자신을 설명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그러나 들뢰즈 철학은 사람이 애초에 하나의 딱 떨어지는 정체성으로 요약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글은 들뢰즈 철학의 핵심 개념들을 바탕으로 ‘정체성 없음’이 무책임하거나 공허한 상태가 아니라, 더 자유롭고 유연하게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태도일 수 있다는 점을 설명한다. 독자는 들뢰즈가 말한 차이, 반복, 리좀, 생성이라는 개념을 일상 언어로 이해하면서, 자신이 꼭 하나의 이름, 하나의 직업, 하나의 유형으로 고정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감각을 얻게 될 것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들뢰즈 철학을 전공 서적의 어려운 용어가 아니라, 진로 고민, 인간관계, 커리어 전환 같은 현실적인 주제들과 연결해서 다룬다. 사람은 누구나 “나는 대체 뭐 하는 사람이지?”라는 질문 앞에서 막막함을 느낀다. 그 순간에 들뢰즈가 제안하는 ‘정체성 없음’의 관점은 한 개인이 자신을 작은 박스에 가둔 채 살아가도록 강요하는 사회적 압력에서 빠져나올 작은 출구가 되어줄 수 있다. 이 글은 그 출구를 함께 찾아 나가는 여정이다.
정체성 강박의 시대, 들뢰즈는 왜 ‘정체성 없음’을 말했을까?
요즘 시대는 사람에게 정체성을 빠르게 정하라고 재촉한다. 사람들은 대학 전공을 정할 때, 첫 직장을 선택할 때, 심지어 SNS 계정을 만들 때조차 “나는 어떤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가”를 집요하게 계산한다. 학교는 학생에게 꿈을 빨리 정하라고 말하고, 회사는 직원에게 장기 커리어 플랜을 제시하라고 요구한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넌 커서 뭐가 되고 싶니?”라는 질문을 반복해서 들으며 자라기 때문에, 언젠가 반드시 자신에게 어울리는 단단한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고 믿게 된다.
그러나 현실에서 사람의 삶은 그렇게 단순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사람은 전공과 다른 일을 하기도 하고, 직업을 여러 번 바꾸기도 하고, 좋아하는 취미나 관심사가 수시로 달라지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회사에서는 차분한 기획자이지만, 집에서는 장난기가 많은 부모이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분위기 메이커이다. 이렇게 한 사람이 여러 얼굴과 여러 역할을 동시에 가지고 있음에도, 사회는 여전히 사람에게 “너는 결국 누구냐, 한 줄로 말해 봐라”라고 묻는다. 이 질문이야말로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들뢰즈 철학은 이런 불안을 직접 겨냥한다. 들뢰즈는 사람이 하나의 고정된 본질이나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의심한다. 들뢰즈는 세계가 끊임없는 흐름과 변화 속에 있다고 보았고, 인간 역시 예외가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들뢰즈는 정체성이라는 단단한 중심보다, 끊임없이 달라지고 이어지고 분기하는 흐름에 더 주목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정체성 없음’은 공허한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람의 실제 모습을 더 잘 설명하는 말이 된다. 사람은 애초에 하나의 답으로 고정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들뢰즈 철학을 빌려 “나는 꼭 누구여야 할까?”라는 질문을 다르게 바라보는 방법을 제안한다. 필자는 독자가 “나는 아직 나를 잘 모르겠다”라고 느낄 때 그것이 실패나 지연이 아니라, 들뢰즈가 말하는 ‘생성의 시간’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서론 이후의 본론에서는 들뢰즈의 주요 개념을 평이한 언어로 풀고, 그것을 실제 삶과 연결하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제시할 것이다.
들뢰즈가 말하는 정체성 없음과 새로운 자기 이해
1. 들뢰즈 철학의 기본 개념으로 보는 ‘정체성 없음’
1-1.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나라는 존재는 고정된 이름이 아니다
들뢰즈 철학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표현 가운데 하나가 ‘차이와 반복’이다. 들뢰즈는 보통 사람들이 반복을 “같은 것이 다시 나타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방식에 의문을 던진다. 들뢰즈에 따르면 사람은 어떤 경험을 반복할 때도, 사실은 이전과 완전히 같은 방식으로 반복하지 못한다. 사람의 몸 상태가 다르고, 주변 환경이 달라지고, 그 사이에 겪은 수많은 일들이 지금의 감각을 이미 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이렇게 들뢰즈는 반복 속에서 차이가 계속 생겨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관점은 정체성을 이해하는 방식에도 큰 변화를 가져온다. 사람은 대개 자신을 설명할 때 “나는 이런 성격이다”, “나는 이런 유형이다”라고 말하면서, 마치 성격이 일정하게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느낀다. 그러나 들뢰즈의 관점에서는, 사람의 성격과 취향, 생각과 감정도 매일 조금씩 다르게 반복되는 흐름이다. 어떤 사람은 평소에는 내향적이지만 특정한 사람들 앞에서는 적극적이 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20대 때와 30대 때의 가치관이 완전히 달라지기도 한다. 이 모든 변화는 우연이 아니라, 차이가 반복 속에서 자라난 결과이다.
그렇다면 들뢰즈에게서 ‘정체성 없음’이란 사실 “고정된 정체성으로는 나를 설명할 수 없다”는 자각에 가깝다. 사람은 여전히 이름을 가지고 있고, 이력서를 가지고 있고, 하나의 몸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이 모든 것은 일시적인 표면에 가깝다. 진짜 중요한 것은 이 표면 뒤에서 계속 변화하고 생성되는 흐름이다. 사람은 그 흐름 위에서 늘 새롭게 자신을 다시 구성한다.
1-2. 들뢰즈의 리좀 개념: 뿌리 대신 줄기로 살아가기
들뢰즈 철학에서 또 하나 유명한 개념은 ‘리좀’이다. 리좀은 땅속에서 옆으로 퍼져 나가는 뿌리줄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들뢰즈는 리좀을 통해, 지식과 존재가 하나의 중심 뿌리에서 위로 자라나는 구조가 아니라, 여러 방향으로 동시에 뻗어 나가는 구조라고 설명한다. 사람은 흔히 자신의 정체성을 거대한 한 그루 나무처럼 상상한다. 사람은 “나는 결국 이런 사람이다”라는 중심 뿌리가 있고, 그 뿌리에서 여러 가지 행동과 선택이 가지처럼 뻗어나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들뢰즈의 리좀 개념을 받아들이면, 사람의 정체성 그림은 완전히 달라진다. 사람은 하나의 중심에서 파생된 존재가 아니라, 여러 경험과 관계, 사건들이 옆으로 얽히며 만들어 낸 네트워크에 가깝다. 사람의 정체성은 특정 순간에 지배적인 한 가지 모습만이 진짜가 아니라, 수많은 연결점들이 동시에 살아 있는 리좀의 상태이다. 어떤 사람은 회사에서의 나, 연애 관계에서의 나, 가족 안에서의 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의 나가 서로 연결되면서도 조금씩 다른 얼굴을 가진다.
들뢰즈는 이런 리좀적 존재 방식을 긍정한다. 들뢰즈는 사람이 하나의 뿌리만을 절대적인 중심으로 여길 때, 다른 가능성들을 억압하게 된다고 보았다. “나는 이런 사람이라 이런 건 하면 안 돼”라는 말 속에는 자기 검열이 숨어 있다. 그러나 리좀적 사고를 받아들이면, 사람은 자신 안의 여러 줄기들을 조금 더 편안하게 인정할 수 있다. 이때 ‘정체성 없음’은 사실 “하나의 중심 뿌리에 나를 가두지 않겠다”는 선언이 된다.
1-3. 들뢰즈의 ‘생성’ 개념: 나는 완성형이 아니라 진행형이다
들뢰즈 철학에서 ‘생성(되기)’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하다. 들뢰즈는 존재를 고정된 결과가 아니라, 특정한 방향으로 계속 움직이고 변화하는 과정으로 바라본다. 사람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사람의 몸은 물론이고, 생각, 감정, 욕망, 관계의 양상까지 모두 시간 속에서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 낸다. 들뢰즈는 이런 상태를 ‘~이 되어 가는 중’이라는 의미에서 생성이라고 부른다.
많은 사람은 삶을 “정체성을 찾는 여정”으로 묘사한다. 이때 사람은 마치 어딘가에 준비되어 있는 진짜 자기를 언젠가 발견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들뢰즈의 생성 개념에 따르면, 사람에게는 찾아야 할 완성형 정체성이 따로 있지 않다. 사람의 정체성은 정답지가 아니라, 매일 새롭게 쓰이는 초안에 가깝다. 오늘의 선택들이 어제의 나와 다르게 이어지면서, 사람은 하나의 완성된 실체가 아니라 또 하나의 새로운 ‘되기’를 만들어 낸다.
이 관점에서 보면, ‘정체성 없음’은 불안의 원인이 아니라 당연한 상태이다. 사람은 여전히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지만, 그 질문의 답을 단 하나의 문장이나 하나의 직업으로 고정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 사람은 자신을 “나는 지금 ~이 되어 가는 사람이다”처럼, 진행형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다. 들뢰즈가 말하는 생성의 철학은 한 개인에게 “지금 나는 미완성이어도 괜찮다”는 허락을 건네준다.
2. 들뢰즈 철학으로 해석하는 현대인의 정체성 불안
2-1.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우리를 더 불안하게 만드는 이유
사람은 성장 과정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중요한 철학적 질문으로 배웠다. 사람은 이 질문을 깊게 고민하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라고 배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 질문이 사람을 더 불안하게 만들 때가 많다. 사람은 안정된 답을 찾지 못하면 실패한 것처럼 느끼고, 남들은 이미 자기 길을 찾은 것 같다는 비교 의식에 시달린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은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단단한 정체성을 빨리 찾아야 한다는 압박에 사로잡힌다.
들뢰즈 철학은 이 질문을 덜 위험한 방식으로 다시 구성한다. 들뢰즈는 사람이 스스로를 하나의 본질적 존재로 정의하려고 할 때, 오히려 살아 있는 차이와 움직임을 놓치게 된다고 본다. 사람은 “나는 누구인가?” 대신 “나는 지금 무엇이 되어 가고 있는가?”, “나는 어떤 관계와 경험 속에서 변하고 있는가?”라고 물을 수 있다. 이런 질문은 사람을 정체성 강박에서 조금씩 멀어지게 한다. 들뢰즈의 관점을 따르면, 답을 찾지 못한 사람은 실패자가 아니라, 아직 생성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사람이다.
2-2. 들뢰즈 관점에서 본 MBTI, 스펙, 직업 정체성의 한계
현대 사회는 사람에게 정체성을 제공하는 도구를 많이 만들어 냈다. MBTI, 애니어그램, 각종 성격 테스트, 학벌, 회사 이름, 직무 이름, 직급, 포트폴리오가 그 예이다. 사람은 이런 도구들을 통해 빠르게 자신을 설명하고, 타인에게 이해시키고, 채용 과정에서 자신을 어필할 수 있다. 그러나 들뢰즈 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도구들은 편리한 만큼 위험하다. 이런 도구들이 사람을 하나의 타입이나 성과로 고정시키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정체성을 고정하는 언어에 늘 경계심을 가진다. 사람은 “나는 ENFP라서 그래”, “나는 개발자라서 그래”, “나는 인문계 출신이라서 이런 건 못 해”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이 말은 한편으로는 위로가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가능성을 미리 줄이는 효과를 낳는다. 들뢰즈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은 특정한 코드로 완전히 설명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언제든 새로운 코드와 연결될 수 있고, 전혀 다른 분야로 이동할 수 있고,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자신을 재구성할 수 있다.
따라서 들뢰즈 철학은 MBTI나 스펙, 직업 정체성을 완전히 버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들뢰즈 철학은 사람에게 “이것은 나를 설명하는 임시적인 언어일 뿐이다”라고 기억하라고 말한다. 사람은 이런 언어들을 참고자료로만 사용하고, 자신의 실제 경험과 욕망, 호기심이 흘러가는 방향을 더 섬세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때 ‘정체성 없음’은 “어떤 코드도 나를 완전히 가둘 수 없다”는 건강한 거리 두기이다.
2-3. ‘정체성 없음’이 오히려 마음을 가볍게 만드는 과정
많은 사람은 ‘정체성 없음’이라는 표현을 들으면 처음에는 공허함을 떠올린다. 사람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절망적인 상태를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들뢰즈 철학에서 말하는 정체성 없음은 이런 공허함과 다르다. 들뢰즈는 사람이 어떤 하나의 정체성에 집착할 때 그 정체성이 곧 감옥이 된다고 본다. 사람은 “나는 이런 사람이니까 이 정도의 삶을 살아야 해”라고 스스로를 감시하게 된다.
정체성 없음의 관점을 받아들이면, 사람은 이런 감시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다. 사람은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자기 정의를 찾지 못해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다. 사람은 “나는 아직도 찾는 중이다”라는 문장을 부끄러운 변명이 아니라, 하나의 자연스러운 상태로 인정할 수 있다. 그렇게 인정하는 순간, 사람의 마음은 의외로 가벼워진다. 사람은 이제 “정체성 찾기”라는 거대한 프로젝트에 인생을 걸 필요가 없다. 사람은 그 시간에 실제로 하고 싶은 일을 조금이라도 시도해 볼 수 있다.
들뢰즈 철학은 사람에게 불안이 완전히 사라진다고 약속하지 않는다. 다만 들뢰즈 철학은 불안을 다르게 바라보는 시각을 제공한다. 사람의 불안은 “나는 아직 정체성을 찾지 못했다”는 부족함의 표지가 아니라, “나는 아직도 여러 가능성을 두고 열려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이때 정체성 없음은 불완전함이 아니라, 열린 상태를 의미한다. 그 열린 상태에서 사람은 다양한 시도와 시행착오를 통해 자신만의 리좀을 더 풍부하게 키워 나갈 수 있다.
3. 들뢰즈의 ‘정체성 없음’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방법
3-1. 역할이 아니라 흐름으로 자신을 보기
사람들이 자신을 설명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보통 역할이다. 사람은 “나는 직장인이다”, “나는 부모이다”, “나는 학생이다”처럼 말한다. 그러나 들뢰즈 철학은 사람에게 역할보다 흐름에 주목하라고 말한다. 사람은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 때 가장 살아 있다고 느끼는가?”, “나는 어떤 순간에 에너지가 생기는가?” 같은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이런 질문은 사람을 직업이나 관계의 타이틀이 아니라, 실제 경험의 흐름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공식적으로는 회계 업무를 담당하는 직장인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사람은 회사에서 동료들에게 정보를 정리해 주고, 복잡한 내용을 쉽게 설명할 때 큰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이 경우에 이 사람의 정체성은 “회계팀 직원”이라는 역할보다, “복잡한 것을 정리하고 설명하는 흐름”에 가까울 수 있다. 들뢰즈의 관점에서 이 흐름이 바로 그 사람이 지금 “되어 가는” 방향이다. 사람은 자신의 일상에서 이런 흐름들을 찾아내고, 여기에 더 많은 에너지를 투자해 볼 수 있다.
3-2. 실패와 진로 변경을 ‘정체성 붕괴’가 아닌 ‘새로운 생성’으로 읽기
현대 사회에서 진로 변경과 실패는 종종 정체성 위기로 이어진다. 사람은 “나는 이 길을 선택했는데, 여기서 실패하면 나는 대체 무엇인가”라고 자책한다. 어떤 사람은 전공과 다른 일을 시작하고 나서, “나는 내 정체성을 배신한 게 아닐까”라는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들뢰즈 철학은 이런 상황을 전혀 다른 언어로 설명할 수 있게 도와준다.
들뢰즈의 생성 개념을 적용하면, 진로 변경과 실패는 정체성 붕괴가 아니라 새로운 생성의 계기이다. 사람은 한 가지 길에서 얻은 경험을 다른 길로 옮겨갈 수 있고,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결합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공대를 졸업한 사람이 글쓰기를 시작하면, 그 사람은 기술과 글쓰기를 결합한 독특한 리좀을 만들어 갈 수 있다. 들뢰즈 관점에서 이 과정은 “공대생 정체성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연결을 통해 다른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다.
사람은 실패를 겪었을 때 “나는 잘못된 선택을 했다”라고만 말할 필요는 없다. 사람은 “나는 이 과정을 통해 무엇이 되어 가고 있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다. 이 질문은 사람을 과거의 선택에 묶어 두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정체성 없음의 태도는 과거의 정의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의를 절대화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3-3. 관계 속에서 ‘한 가지 나’가 아닌 ‘여러 가지 나’를 허용하기
들뢰즈 철학은 관계에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사람은 종종 “진짜 나는 이런 사람인데, 이 사람 앞에서는 나답지 못하다”라고 말한다. 이 말 속에는 진짜 나는 하나뿐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들뢰즈의 리좀 개념을 떠올리면, 사람은 관계마다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은 어차피 여러 줄기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친구들 사이에서는 유머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다. 이 사람은 회사에서는 조용한 직원이고, 가족들 앞에서는 책임감 강한 자녀일 수 있다. 이 모든 모습은 가짜가 아니라 각각 다른 상황에서 활성화되는 줄기들이다. 들뢰즈 관점에서 사람은 한 가지 모습만을 진짜라고 고집할 필요가 없다. 사람은 자신 안의 여러 얼굴을 인정하고, 상황에 따라 다른 줄기가 더 강하게 드러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정체성 없음의 태도는 관계에서도 자유를 준다. 사람은 누군가와의 관계가 끝났을 때, “이 관계가 끝났으니 나도 끝났다”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사람은 새로운 관계 속에서 또 다른 자신을 만들어 갈 수 있다. 들뢰즈 철학은 사람에게 “나는 항상 다시 만들어질 수 있는 존재”라는 자각을 건네며, 관계의 시작과 끝에서 오는 감정의 파도를 조금 더 유연하게 건너도록 도와준다.
3-4. 들뢰즈 철학으로 설계하는 나만의 느슨한 인생 로드맵
사람은 현실적으로 진로와 삶을 계획할 필요가 있다. 들뢰즈 철학이 정체성 없음과 변화를 강조한다고 해서, 사람이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고 즉흥적으로만 살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들뢰즈 철학은 사람에게 너무 딱딱한 인생 계획 대신, 방향성과 여지를 함께 담은 느슨한 로드맵을 제안한다. 이 로드맵에서는 목적지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사람은 먼저 “나는 어떤 흐름을 좋아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사람은 문제를 해결하는 흐름, 사람을 돕는 흐름, 정보를 정리하는 흐름,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흐름, 아이디어를 연결하는 흐름 등 여러 가지 흐름 중에서 자신이 오래 집중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이 흐름을 찾으면, 사람은 특정한 직업 하나에 집착하지 않고도 여러 가능성을 열어 둔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사람들의 어려운 문제를 쉽게 풀어 주는 흐름을 좋아한다”라는 방향을 세운 사람은 상담, 교육, 글쓰기, 콘텐츠 제작 등 다양한 길을 동시에 탐색해 볼 수 있다.
들뢰즈식 로드맵에서는 계획의 여백이 중요하다. 사람은 3년 뒤, 5년 뒤의 구체적인 직위나 연봉보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싶은가?”를 중심에 둔다. 사람은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기회를 만났을 때,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스스로를 묶지 않고, 기꺼이 새로운 생성에 몸을 실을 수 있다. 이때 정체성 없음은 방황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니라, 변화 가능성을 항상 열어 두는 적극적인 전략이 된다.
들뢰즈가 우리에게 남긴 ‘정체성 없음’의 용기
지금까지 이 글은 들뢰즈 철학을 바탕으로 ‘정체성 없음’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들뢰즈는 사람이 하나의 본질, 하나의 중심, 하나의 이름으로만 정의될 수 없다고 보았다. 들뢰즈 철학에서 세계는 끊임없는 차이와 반복, 생성의 흐름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 역시 예외가 아니다. 사람은 매일 조금씩 달라지고, 새로운 연결을 만들고,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뻗어 나가는 리좀적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들뢰즈에게서 정체성 없음은 공허함이 아니라 정직함이다. 사람은 스스로를 정직하게 바라볼 때, 자신이 실제로는 하나의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라 수많은 경험과 관계가 얽혀 있는 과정임을 인정할 수 있다. 들뢰즈 철학은 사람에게 “너는 아직도 되어 가는 중이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어떤 사람에게는 위로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조용한 용기가 된다. 사람은 이제 더 이상 “나는 아직도 정체성을 못 찾았다”라고 자책할 필요가 없다.
물론 정체성 없음의 태도는 책임 회피와는 다른 길이다. 사람은 여전히 선택을 해야 하고, 관계에 성실해야 하고, 자신이 한 말과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다만 들뢰즈 철학은 그 책임을 “한 번 정한 정체성에 영원히 충성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들뢰즈 철학은 책임을 “지금 여기에서의 선택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다음 순간에 더 나은 방향으로 달라질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정체성 없음의 용기는 사실 변화에 대한 책임 있는 태도이기도 하다.
오늘 당장 시도해 볼 작은 실천들
마지막으로 이 글은 들뢰즈 철학을 일상에 조금씩 적용해 보고 싶은 사람에게 몇 가지 작은 실천을 제안하고 싶다. 첫째로 사람은 자기소개를 할 때, 한 줄 정체성 대신 한동안 자신이 집중하고 있는 흐름을 말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개발자입니다” 대신 “나는 요즘 사람들이 더 편하게 쓸 수 있는 도구를 만드는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문장은 역할보다 흐름을 드러낸다.
둘째로 사람은 실패나 진로 변경을 겪을 때, “나는 이제 무엇이 되어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노트에 적어 볼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의 경험이 한 방향의 끝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이어지는 리좀의 분기점일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수 있다. 셋째로 사람은 관계 속에서 “이 사람 앞에서 드러나는 나의 또 다른 줄기는 무엇인가?”라고 돌아볼 수 있다. 이 질문은 사람에게 한 가지 모습만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 다양한 나를 허용하는 연습을 시켜 준다.
들뢰즈 철학은 어렵고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정체성과 불안, 진로와 관계에 대한 우리의 고민 속으로 가져오면 매우 현실적인 언어로 다시 읽힌다. 사람은 들뢰즈의 개념들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 사람은 그저 “나는 꼭 하나로 정의되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문장을 가슴 한쪽에 넣어 두기만 해도 조금은 가벼워질 수 있다. 이 글이 독자에게 그런 작은 가벼움을 선물했다면, 그것만으로도 들뢰즈가 말한 ‘정체성 없음’의 가치가 조용히 작동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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