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뢰즈 철학으로 다시 묻는 ‘되기-혁명’의 가능성
현대 사회에서 사람은 “변화해야 한다”라는 말을 너무 자주 듣는다. 사람은 자기계발 영상, 동기부여 강연, SNS 속 자극적인 한 줄 문장을 통해 “지금 당장 인생을 갈아엎어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라”라는 요구를 반복해서 마주한다. 그러나 사람은 이러한 메시지에 반응해 수없이 다짐하고 계획을 세워 보지만, 몇 주만 지나면 다시 예전의 패턴과 습관으로 돌아온 자신을 발견한다. 이 반복되는 경험 속에서 사람은 조용히 자문한다. “정말로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되기-혁명’ 같은 변화가 가능한가, 아니면 애초에 허상인가?”
들뢰즈 철학은 이 질문에 대해 흥미로운 길을 제공한다. 들뢰즈는 사람과 세계를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되기(becoming)’의 흐름으로 이해한다. 들뢰즈에게 사람은 이미 항상 변화의 한가운데에 있다. 그렇다면 사람은 왜 변화가 없다고 느끼는가? 필자는 이 글에서 들뢰즈의 되기, 분자적 변화, 소수적 되기, 리좀 개념을 활용해 변화의 조건을 다시 구성해 본다. 필자는 특히 들뢰즈가 말하는 변화가 흔히 떠올리는 ‘인생 역전’식 드라마와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들뢰즈의 관점이 실제 삶에서 어떤 전략으로 번역될 수 있는지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이 글은 개요, 서론, 본론, 결론, 마무리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개요에서는 들뢰즈 철학과 되기-혁명이라는 큰 틀을 제시하고, 서론에서는 변화 강박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구체적인 심리 상태를 들뢰즈 관점에서 풀어낸다. 본론에서는 들뢰즈의 핵심 개념을 일상 언어로 해석하고, 개인과 사회 구조 사이에서 변화가 실제로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분석한다. 결론과 마무리에서는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서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작지만 현실적인 들뢰즈식 되기-혁명 실천 전략을 제안한다.
들뢰즈와 변화 강박의 시대, 왜 사람은 계속 제자리일까?
사람은 스마트폰을 켰을 때, 수많은 변화의 슬로건을 한 번에 마주한다. 사람은 “올해 안에 인생 바꾸는 법”, “50일 만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루틴”, “월급쟁이에서 파이어족으로 되기” 같은 제목을 스크롤 한 번에 여러 개 읽는다. 사람은 이런 문장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자극을 받고, 한편으로는 묘한 피로감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낀다. 사람은 이미 몇 번이나 비슷한 문장을 보고 변화를 결심했다가 흐지부지한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변화의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사람은 건강을 위해, 경제적 안정성을 위해, 관계의 개선을 위해, 스스로도 바뀌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실제로 변화하려고 할 때, “이번에는 진짜 다르게 살고 싶다”라고 다짐하면서도 항상 비슷한 장면을 반복한다. 사람은 첫날에는 계획표를 만들고, 둘째 날에는 조금 실천하다가, 셋째 날에는 피곤함을 이유로 쉬고, 그 다음 주에는 아예 그 계획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다시 불쑥 떠오른 죄책감과 함께 “나는 왜 이렇게 변화를 못 할까?”라고 자책한다.
들뢰즈는 이 상황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읽는다. 들뢰즈는 사람이 “원래 이런 사람이라서 변하지 못한다”라고 생각하는 관점을 문제 삼는다. 들뢰즈에게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고정된 성격과 본질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니다. 들뢰즈에게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관계, 환경, 제도, 언어, 몸의 상태에 따라 끊임없이 ‘되어 가는’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들뢰즈는 “변할 수 있는가?”보다는 “이미 어떻게 변하고 있고, 어디를 향해 변하고 있는가?”를 묻는다.
서론에서 필자는 변화 강박이 만들어내는 자기혐오의 구조를 짚어 보고, 들뢰즈가 제안하는 되기-혁명 관점이 이 구조를 어떻게 비틀 수 있는지를 간단히 풀어내고자 한다. 필자는 사람이 스스로를 게으르거나 의지박약한 존재로만 규정하는 대신, “나를 둘러싼 배치가 지금 나를 어떤 방향으로 되게 만들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 변화의 조건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고 본다. 이 질문이 바로 본론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게 될 들뢰즈식 출발점이다.
들뢰즈가 말하는 ‘되기-혁명’과 실제 변화의 메커니즘
1. 들뢰즈 철학에서 ‘되기’가 의미하는 혁명
1-1. 들뢰즈의 ‘되기’ 개념: 상태가 아니라 운동이라는 관점
들뢰즈 철학에서 ‘되기’는 단순한 성장이나 발전과 다르다. 들뢰즈에게 되기는 A에서 B로 이동하는 직선적 단계가 아니다. 들뢰즈에게 되기는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방향으로의 탈선, 전환, 비틀림을 포함하는 운동이다. 사람은 일상에서 자신을 설명할 때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식으로 말한다. 사람은 “나는 내향적이다”, “나는 논리적이다”, “나는 감정적인 편이다” 같은 말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들뢰즈는 이런 문장이 사람의 실제 모습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고 본다.
들뢰즈 관점에서 사람은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가는 중이다”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사람은 전날과 오늘이 미세하게 다르고, 사람은 오전과 오후의 기분이 다르며, 사람은 집에 있을 때와 회사에 있을 때의 반응이 다르다. 들뢰즈는 이 ‘다르게 반응함’이 예외가 아니라 원칙이라고 주장한다. 들뢰즈에게 정체성은 고정된 핵심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되기의 궤적이다.
그렇다면 들뢰즈에게 ‘되기-혁명’은 무엇을 뜻하는가? 들뢰즈에게 되기-혁명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갈아 끼우는 일”이 아니라, “되기의 방향이 크게 틀어지는 사건”에 가깝다. 사람은 이미 매일 조금씩 변하고 있지만, 어떤 순간에는 이 변화를 지탱하는 방향 자체가 다른 축으로 옮겨간다. 들뢰즈 관점에서 이 방향 전환이 바로 혁명적인 되기이다.
필자는 독자가 여기에서 한 가지를 기억하기를 바란다. 사람은 “나는 왜 변하지 못하지?”라고 묻기 전에, “나는 지금 어떤 방향으로 되어 가고 있지?”라고 물어볼 수 있다. 이 질문은 사람에게 이미 일어나고 있는 작은 변화를 감지하게 하고, 그 변화의 방향을 조정하는 주체로 서게 한다. 들뢰즈의 되기 개념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실질적인 힘을 가진다.
1-2. 들뢰즈의 분자적 변화와 거대한 혁명의 차이
들뢰즈 철학에서 분자적 변화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들뢰즈는 사회나 개인의 변화를 이야기할 때, 눈에 잘 보이는 거대 사건보다 눈에 잘 안 보이는 미세한 변화를 강조한다. 사람은 “혁명”이라는 말을 들으면 거리의 시위, 정권 교체, 직업 전환, 이민처럼 큰 장면을 떠올린다. 사람은 자기 인생에서도 “완전히 다른 도시로 옮기겠다”, “아예 다른 분야로 이직하겠다” 같은 큰 변화만을 혁명이라고 부르고 싶어 한다.
그러나 들뢰즈에게 거대한 변화는 수많은 분자적 변화가 축적된 결과이다. 사람의 하루를 예로 들면, 사람이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 사람이 휴대폰을 집어 드는 순서, 사람이 누구와 가장 많이 대화하는지, 사람이 어느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는지가 모두 분자적 요소이다. 들뢰즈는 이 분자적 배치가 조금씩 바뀔 때, 나중에는 완전히 다른 삶의 패턴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사람이 퇴근 후 3시간을 영상 시청에 쓰던 패턴을 조금씩 줄이고, 한 시간은 공부, 한 시간은 걷기, 한 시간은 쉬는 시간으로 나누기 시작했다고 가정해 보자. 처음 한두 주 동안 사람은 “거의 달라진 게 없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세 달, 여섯 달이 지나면 이 분자적 변화는 사람의 몸 상태, 생각, 인간관계까지 전부 다르게 만들어 버릴 수 있다. 들뢰즈에게 되기-혁명은 이 분자적 변화들이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이다.
필자는 독자가 변화의 크기를 재는 잣대를 다시 생각해 보기를 제안한다. 사람은 여전히 ‘대형 이벤트’식 변화에 매료되지만, 들뢰즈는 “혁명은 이미 매일 조금씩 진행 중”이라고 말한다. 되기-혁명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분자적 변화의 조용한 누적 위에서 자라나는 것이다.
1-3. 들뢰즈의 소수적 되기와 ‘조용한 혁명’의 힘
들뢰즈 철학에서 소수적 되기는 다수의 규범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방식을 탐색하는 움직임을 뜻한다. 다수는 “보통 이 나이에는 이 정도는 되어 있어야 한다”, “이 직업을 가진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 같은 규범을 만든다. 사람은 이 규범을 자연스럽게 내면화한다. 그러나 들뢰즈는 이런 다수의 기준이 모든 사람에게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본다.
소수적 되기는 거창한 반항이 아닐 수 있다. 소수적 되기는 안정적인 길을 놔두고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하는 극단적인 사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소수적 되기는 조직 안에서 ‘당연한’ 회의 방식에 질문을 던지는 행동일 수 있고, 가족 안에서 “항상 참고 웃기만 하던 역할”을 조금씩 내려놓는 선택일 수 있다. 소수적 되기는 또래가 모두 추구하는 소비 패턴에서 살짝 비켜 서서, 자신의 욕망이 진짜 원하는 것을 실험해 보는 행동일 수도 있다.
들뢰즈는 이런 소수적 되기가 누적될 때, 사회 전체의 감수성이 달라진다고 본다. 사람은 자신이 하는 작은 선택이 아무 의미 없다고 느끼지만, 들뢰즈 관점에서 작은 선택은 모두 분자적 소수적 되기이다. 이 되기들이 서로 연결되면, 어느 순간 다수의 기준 자체가 흔들린다. 이 과정이 바로 조용한 혁명이다.
필자는 독자에게 되기-혁명을 꼭 ‘모두가 알아보는 극적인 사건’으로 상상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사람은 자신이 이미 소수적 되기를 어디에서 실천하고 있는지 돌아볼 수 있다. 이 돌아봄은 자기 비난이 아니라 자기 인정의 출발점이다. 들뢰즈 철학은 이 작은 소수적 되기들을 혁명적 잠재력을 가진 움직임으로 격상시킨다.
2. 들뢰즈 관점에서 본 개인 변화와 사회 구조의 관계
2-1. 들뢰즈와 자기계발 담론의 차이: ‘나만 바뀌면 된다’의 함정
현대 자기계발 담론은 사람에게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라고 말한다. 사람은 이 말을 듣고 책임감을 느끼지만 동시에 압박도 느낀다. 사람은 성공하지 못하면, 행복하지 못하면, 건강하지 못하면 “결국 이것은 내 마음가짐 탓”이라고 결론 내리게 된다. 이 구조 안에서 사람은 사회 구조나 제도의 문제를 보지 못하고, 자신의 의지를 끝없이 탓하는 순환에 빠진다.
들뢰즈 철학은 이 순환을 끊어 내려 한다. 들뢰즈는 사람이 항상 ‘배치(agencement)’ 속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배치는 개인, 조직, 제도, 언어, 기술, 공간, 시간, 경제 등이 엮여 있는 전체 구성을 의미한다. 사람은 이 배치 속에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들뢰즈에게 변화는 개인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배치를 새롭게 조합하는 문제이다.
예를 들어, 사람이 지독한 야근 문화 속에서 일하면서 “나는 왜 자기계발을 못 하지?”라고 자책하는 상황을 떠올려 보자. 들뢰즈 관점에서 이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다. 들뢰즈 관점에서 적절한 질문은 “이 배치에서는 자기계발이 구조적으로 어려운 것은 아닐까?”이다. 사람은 자신의 체력, 출퇴근 시간, 조직 문화, 업무량, 보상 구조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때 변화는 개인이 더 독해지는 것이 아니라, 배치를 조금이라도 바꾸는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필자는 독자가 자신의 변화 실패를 떠올릴 때, “나는 왜 의지가 약할까?” 대신 “나는 어떤 배치 속에 갇혀 있었을까?”를 떠올려 보기를 제안한다. 이 질문 하나만으로도 사람의 자기혐오는 조금 줄어들고, 변화 전략은 훨씬 현실에 가까워진다. 들뢰즈 철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자기계발 담론과 갈라선다.
2-2. 들뢰즈와 시스템 이해: 구조를 읽는 되기-혁명
들뢰즈는 시스템을 하나의 거대한 벽으로 보지 않는다. 들뢰즈는 시스템을 수많은 요소가 연결된 망으로 본다. 이 망에는 법과 규칙뿐 아니라, 관습, 말투, 감정의 분위기, 공간 배치, 조직 도표, 일정표, 기술 장비가 모두 포함된다. 사람은 이런 요소들이 엮인 환경 속에서 매일 반응하고 선택한다.
되기-혁명을 준비하는 사람은 먼저 이 망을 읽는 연습을 해야 한다. 사람은 “나는 왜 이 시간쯤 되면 항상 의욕이 떨어질까?”, “나는 왜 이 사람 앞에서는 말을 제대로 못 할까?”, “나는 왜 집만 오면 소파에 쓰러질까?”를 질문할 수 있다. 이 질문에 대해 사람은 단순히 “나는 원래 게으르다”라고 답할 수 없다. 사람은 조명의 밝기, 책상의 위치, 의자의 편안함, 스마트폰의 알림, 주변 사람의 기대, 일정표의 구조 같은 요소들을 함께 살펴야 한다.
들뢰즈에게 되기-혁명은 시스템을 완전히 철폐하는 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되기-혁명은 시스템 내부의 연결을 다른 방식으로 재배치하는 실천이다. 사람은 기존 규칙 속에서도 새로운 배치를 시도할 수 있다. 사람은 회의 방식, 팀 내 정보 흐름, 일하는 장소, 문서를 정리하는 형식 등을 바꾸는 실험을 제안할 수 있다. 이런 실험들은 작아 보이지만, 시스템 안에서 새로운 되기의 길을 열어 준다.
필자는 독자가 지금 속한 시스템을 “불평해야 할 대상”으로만 보지 말고, “읽고 조정할 수 있는 배치”로도 보기를 권한다. 사람은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꾸기 어려운 것을 구분하면서, 작은 조정이 큰 되기-혁명의 기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다. 들뢰즈 철학은 구조를 이해하는 사람에게 더 많은 선택지를 제공한다.
2-3. 들뢰즈와 감정·습관·몸: 변화가 번번이 실패하는 숨은 이유
사람은 변화 계획을 세울 때 주로 머리와 의지만을 사용한다. 사람은 “이제부터는 이렇게 하겠다”라는 문장을 노트에 적고, 달력에 목표를 표시하고, 체크리스트를 만든다. 그러나 들뢰즈 관점에서 변화는 생각뿐 아니라 감정, 습관, 몸의 차원에서 동시에 움직일 때 비로소 지속된다. 사람이 이 부분을 놓치면 변화는 시작하자마자 벽에 부딪힌다.
들뢰즈는 욕망과 정동(감정의 에너지)을 중요하게 본다. 사람은 싫어하는 일을 억지로 반복하면서 영원히 지속하기 어렵다. 사람의 몸은 피로, 집중력 저하, 짜증, 무기력이라는 신호를 보내면서 저항한다. 사람은 이 신호를 의지 부족으로만 해석하지만, 들뢰즈 관점에서 이 신호는 “지금 이 되기의 방식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라는 경고에 가깝다.
예를 들어, 사람이 새벽 5시에 일어나 공부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고 가정해 보자. 사람의 직업, 통근 시간, 가족 상황, 체력 상태, 수면 패턴을 고려하지 않은 채 세운 계획은 몸에게 과도한 폭력을 가한다. 사람은 며칠은 버틸 수 있지만, 곧 탈진한다. 이때 사람은 “나는 역시 안 되는 사람”이라고 결론 내리지만, 들뢰즈는 “이 배치와 이 몸에게 맞지 않는 되기를 강요했다”라고 말할 것이다.
필자는 독자가 변화 계획을 세울 때, “이 계획은 내 몸과 감정이 감당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반드시 추가하기를 권한다. 사람은 되기-혁명을 원하면서도, 몸과 감정이 견딜 수 있는 되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들뢰즈 철학은 변화가 실패하는 이유를 개인의 결함이 아니라, 배치와 몸의 불일치에서 먼저 찾는다.
3. 들뢰즈 철학으로 설계하는 ‘되기-혁명’ 실천 전략
3-1. 들뢰즈식 실험: 거창한 결심보다 ‘배치 바꾸기’부터
들뢰즈 철학은 실험의 철학이라고 불릴 만하다. 들뢰즈는 완벽한 계획보다 작은 실험을 계속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들뢰즈에게 되기-혁명은 처음부터 완성된 그림을 가지고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시행착오 속에서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는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거대한 결심보다 작은 배치 변경을 우선해야 한다.
사람은 아주 구체적인 질문으로 출발할 수 있다. 사람은 “나는 가장 자주 시간을 흘려보내는 장소가 어디인가?”, “나는 어떤 시간대에 가장 멍해지는가?”, “나는 누구와 대화할 때 가장 에너지가 빠져나가는가?”를 적어 본다. 이런 질문을 통해 사람은 자신의 현재 배치를 눈에 보이게 만든다.
그 다음 단계에서 사람은 이 배치 중 하나만 바꾸는 실험을 할 수 있다. 사람은 공부를 항상 침대에서 했었다면, 카페나 도서관으로 공간을 옮겨 보는 실험을 할 수 있다. 사람은 소셜 미디어를 침대에서 보던 습관을 거실로 옮기거나, 시간을 정해 두는 방식으로 바꿔 볼 수 있다. 사람은 업무 메신저를 확인하는 시간을 하루 몇 번으로 제한하는 실험을 할 수도 있다.
들뢰즈식 실험의 핵심은 “작지만 구체적인 배치 변경”이다. 사람은 이 작은 실험을 통해 자신의 반응을 관찰한다. 사람은 예전보다 집중이 조금 나아졌는지, 피로감이 줄었는지, 감정이 덜 요동치는지 기록한다. 이 기록이 쌓이면, 사람은 자신에게 맞는 되기의 방향을 조금씩 찾아간다. 필자는 이 과정을 “조용한 되기-혁명”이라고 부르고 싶다.
3-2. 들뢰즈와 관계 재구성: 혼자가 아니라 ‘함께 되기’
들뢰즈 철학에서 되기는 언제나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 들뢰즈는 존재를 고립된 개체가 아니라 관계적 장으로 본다. 사람은 누구와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어떤 커뮤니티에 속해 있는지, 누구의 시선을 의식하는지가 모두 되기의 방향을 바꾼다. 그렇기 때문에 되기-혁명은 혼자서만 이루어지기 어렵다.
사람은 자신의 되기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연결될 필요가 있다. 사람은 변화하고 싶은 방향을 스스로에게만 숨겨 두지 말고, 신뢰하는 몇 사람에게 조심스럽게 말해 볼 수 있다. 사람은 “나는 요즘 이런 방식으로 살아보고 싶다”, “나는 이런 패턴을 줄이고 싶다”라고 고백하면서, 도움과 피드백을 요청할 수 있다.
들뢰즈 관점에서 이런 대화는 단순한 상담이 아니다. 이런 대화는 “함께 되기(becoming-with)”의 장이다. 사람은 타인의 시선 속에서 자신을 새롭게 구성하고, 타인의 언어를 빌려 자신의 감정을 명명한다. 이 과정에서 사람은 혼자서는 떠올릴 수 없었던 선택지를 발견하기도 한다.
필자는 독자가 되기-혁명을 꿈꿀 때, “나는 누구와 함께 이러한 되기를 나누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던져 보기를 권한다. 사람은 모든 사람과 자신의 변화를 나눌 필요는 없다. 사람은 단 한 명이라도 괜찮다. 되기-혁명은 종종 아주 작은, 그러나 진실한 관계에서 시작된다. 들뢰즈 철학은 관계를 변화의 부수 요소가 아니라, 변화의 핵심 조건으로 놓는다.
3-3. 들뢰즈 리좀 전략: 직선 계획 대신 네트워크적 성장 도식
들뢰즈 리좀 개념은 되기-혁명 전략을 설계할 때 유용하다. 리좀은 중심과 뿌리가 하나인 나무 구조가 아니라, 여러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줄기 구조를 가리킨다. 들뢰즈는 사람의 삶과 지식을 리좀처럼 이해하자고 제안한다. 사람은 “20대에는 이것, 30대에는 이것, 40대에는 이것”이라는 직선형 인생 계획에 익숙하지만, 현실에서 삶은 훨씬 더 복잡한 리좀의 형태를 띠고 있다.
되기-혁명을 리좀적으로 설계한다는 것은, 하나의 목표에 올인하는 대신 여러 연결 지점을 만든다는 뜻이다. 사람은 예를 들어 “나는 사람을 돕는 일을 하고 싶다”라는 방향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이 방향을 가진 사람은 상담, 교육, 글쓰기, 기획, 콘텐츠 제작 등 여러 줄기를 동시에 탐색할 수 있다. 사람은 이 줄기들 사이를 오가면서 자신에게 더 맞는 조합을 찾아낼 수 있다.
리좀 전략을 사용하면, 사람은 실패를 다르게 바라볼 수 있다. 사람은 한 줄기에서 충분한 만족을 얻지 못하더라도, 그 줄기를 통해 얻은 경험을 다른 줄기로 옮겨갈 수 있다. 사람은 “나는 이 시도에서 완전히 실패했다”라고 생각하는 대신, “나는 이 줄기를 통해 이런 능력과 통찰을 얻었고, 이제 다른 줄기로 옮겨갈 수 있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필자는 독자에게 노트 한 장에 자신의 관심 줄기를 그려 보기를 추천한다. 사람은 중심에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적고, 그 가치와 연결될 수 있는 다양한 활동과 직업, 관계 방식을 리좀처럼 이어 그려볼 수 있다. 이 그림은 완벽할 필요가 없다. 이 그림은 되기-혁명을 직선형 인생 설계가 아니라, 유연한 네트워크로 보는 눈을 길러 준다. 들뢰즈 리좀 전략은 변화의 실패를 줄이는 대신, 변화의 가능성을 넓힌다.
3-4. 들뢰즈가 제안하는 실패 친화적 변화 루프 만들기
들뢰즈 철학은 실패를 특별히 신성시하지도, 악마화하지도 않는다. 들뢰즈에게 실패는 되기의 한 형태이다. 실패는 특정 방향의 되기가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렵다는 신호이다. 중요한 것은 실패 이후 되기가 완전히 멈추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전환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
사람은 보통 변화 계획이 깨지면, 계획 전체를 버리고 자신을 탓하는 패턴을 반복한다. 사람은 “이제 다시 처음부터”라고 말하며, 매번 0과 1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그러나 들뢰즈식 되기-혁명은 0과 1 사이를 왕복하는 대신, 0.1, 0.2, 0.3처럼 조금씩 다른 지점을 쌓아 나가는 루프를 만든다.
사람은 실패 친화적 변화 루프를 만들기 위해 간단한 규칙을 사용할 수 있다. 사람은 “계획이 깨지면, 그 다음 날에는 무조건 ‘축소 버전’으로라도 실행한다”라는 규칙을 정할 수 있다. 사람은 하루 한 시간 공부 계획을 실패했다면, 다음 날에는 10분만이라도 책을 펴는 것으로 루프를 유지한다. 이렇게 하면 사람의 되기는 “완전히 중단”이 아니라 “속도 조절”을 경험한다.
또 사람은 주간 리뷰 시간을 정해서, “이번 주에 나는 어떤 되기가 강화됐고, 어떤 되기가 약해졌는가?”를 적어 볼 수 있다. 사람은 잘한 점과 못한 점을 나열하는 대신, 되기의 방향을 중심으로 주간을 돌아본다. 이 방식은 사람에게 실패를 단순한 좌절이 아니라, 되기를 수정하는 정보로 받아들이도록 훈련시킨다.
필자는 독자가 변화의 루프를 만들 때, “나는 실패해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기를 권한다. 들뢰즈 철학은 완벽한 성공보다, 실패해도 계속 이어지는 되기의 흐름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이 흐름이 바로 되기-혁명의 숨은 엔진이다.
들뢰즈가 알려주는 것 – 되기-혁명은 폭발이 아니라 누적이다
지금까지 이 글은 들뢰즈 철학을 바탕으로 ‘되기-혁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어떤 조건에서 가능한지 살펴보았다. 들뢰즈에게 사람은 이미 항상 ‘되어 가는 존재’이다. 사람은 고정된 본질을 가진 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관계, 환경, 제도, 몸, 감정의 영향을 받으면서 계속 변한다. 그렇기 때문에 들뢰즈에게 진짜 질문은 “사람이 변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사람이 어디를 향해 변하고 있는가?”이다.
들뢰즈 관점에서 되기-혁명은 어느 날 갑자기 인생이 뒤집히는 기적이 아니다. 되기-혁명은 분자적 변화의 누적, 소수적 되기의 축적, 시스템 배치의 조정, 관계의 재구성, 몸의 감각에 대한 섬세한 경청이 만나 임계점을 넘어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외부에서 볼 때는 조용하게 보일 수 있지만, 당사자에게는 존재의 방향이 바뀌는 결정적 사건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필자는 결론에서 한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 이미 벌어지고 있는 작은 변화를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오늘 일찍 잠들기 위해 휴대폰을 10분 덜 보는 선택을 할 수 있고,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을 소모시키는 관계에서 한 걸음 물러나는 결정을 할 수 있다. 사람은 출근길을 바꾸는 실험, 식습관을 조금씩 조정하는 시도, 새로운 배움을 위해 하루 15분을 떼어 놓는 행동을 할 수 있다. 들뢰즈 관점에서 이 모든 것이 되기-혁명의 구성 요소이다.
되기-혁명은 거대한 불꽃놀이처럼 한 번 터지고 끝나는 이벤트가 아니다. 되기-혁명은 작은 불씨가 계속 이어지는 과정이다. 사람은 이 불씨를 스스로 지키고 키워야 한다. 들뢰즈 철학은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이미 되어 가는 중이다. 이제 너는 그 되기가 향하는 방향을 조금 더 의식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 이 깨달음이 바로 들뢰즈가 선물하는 변화의 조건이다.
오늘 당장 시작할 수 있는 들뢰즈식 되기-혁명 연습
마무리에서 필자는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오늘 바로 실천해 볼 수 있는 간단한 들뢰즈식 되기-혁명 연습을 정리하고자 한다. 이 연습들은 거창하지 않지만, 분명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사람은 이 중 한 가지만 선택해도 된다. 중요한 것은 실행 가능성과 지속 가능성이다.
첫째로 사람은 오늘 하루가 끝나기 전에 “나는 지금 무엇이 되어 가는 중인가?”라는 질문을 노트에 적어 볼 수 있다. 사람은 일, 관계, 건강, 생각, 감정 영역에서 자신이 어떤 방향의 되기를 반복하고 있는지 솔직하게 적어 본다. 이 기록은 스스로의 되기를 외면하지 않는 첫걸음이다.
둘째로 사람은 내일부터 실천할 “배치 변경 한 가지”를 정할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의 하루에서 가장 에너지를 많이 빼앗기는 지점을 떠올리고, 그 지점을 조금 바꾸는 실험을 설계한다. 사람은 책상을 치우거나, 알림을 줄이거나, 출근 시간을 조정하거나, 점심시간을 온전히 자신에게 쓰는 방식으로 배치를 바꿀 수 있다. 이 변경이 거창하지 않아도 괜찮다.
셋째로 사람은 한 명의 사람을 떠올려, 그 사람과 “함께 되고 싶은 방향”을 적어 볼 수 있다. 사람은 그 사람에게 메시지를 보내 작은 공동 실험을 제안할 수 있다. 사람은 “우리 한 달 동안 이 습관을 같이 만들어 볼래?”라고 제안하면서, 되기-혁명을 혼자서 떠안지 않는다. 이 제안은 관계를 움직이는 동시에, 스스로의 되기를 강화한다.
넷째로 사람은 실패 루프를 미리 설계할 수 있다. 사람은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계획을 지키지 못해도, 다음 날에는 축소 버전으로라도 돌아온다.” 이 약속은 완벽주의의 덫에서 사람을 구해낸다. 들뢰즈식 되기-혁명은 완벽한 사람을 요구하지 않는다. 들뢰즈식 되기-혁명은 계속 돌아오는 사람, 다시 시도하는 사람을 요구한다.
필자는 이 글이 독자에게 거대한 혁명 선언문이 아니라, 작지만 구체적인 움직임으로 이어지는 안내서가 되기를 바란다. 사람은 내일의 삶 전체를 바꾸지 못할지라도, 오늘의 되기를 조금 다르게 만들 수 있다. 그 조금의 차이가 쌓일 때, 들뢰즈가 말한 되기-혁명은 어느새 현재형 문장이 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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