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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들뢰즈 & 현대 사유

질 들뢰즈의 철학을 심리학으로 풀어본다면 – 정체성은 고정된 게 아니다

by 둥둥팍 2025. 12. 12.

alt: 거울 속 다양한 얼굴을 보는 인물의 초현실적 이미지

목차

 

서론: 철학과 심리학의 만남, 들뢰즈로 풀어내다

철학과 심리학은 오래도록 독립적인 학문처럼 여겨졌지만, 실제로 이 두 분야는 인간이라는 동일한 존재를 다루기 때문에 깊은 연관성을 가진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 ‘나’라는 존재의 정체성은 더 이상 고정된 개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이는 다양한 사회적 정체성, 디지털 자아, 문화적 영향 아래 유동적으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대적 상황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데 매우 유용한 철학자가 바로 질 들뢰즈(Deleuze)다. 들뢰즈는 기존 철학 체계에 대한 비판을 바탕으로 전혀 새로운 사유 체계를 제시했으며, 그의 이론은 심리학, 사회학, 예술 이론 등 다양한 분야에 영감을 주었다.

이 글에서는 들뢰즈 철학의 핵심 개념을 바탕으로, 그것이 현대 심리학과 인간 정체성에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는지 탐구해보고자 한다. 특히 고정된 자아 개념을 탈피하고, 끊임없이 생성되는 존재로서 인간을 이해하는 관점은 현재의 심리학에서도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

들뢰즈 철학의 핵심 개념들

리좀(rhizome): 고정되지 않은 정체성

들뢰즈의 철학에서 가장 유명한 개념 중 하나는 바로 ‘리좀(rhizome)’이다. 식물학에서 리좀은 수평으로 뻗어나가는 뿌리 구조를 의미한다. 리좀은 중앙이 없고, 끝도 없으며, 어디서든 새로운 가지가 뻗어나갈 수 있다. 들뢰즈는 이 구조를 인간 존재와 지식의 비유로 사용했다. 즉, 인간의 자아도 단일하고 고정된 중심에서 출발하지 않고, 다양한 경험, 기억, 감정의 접점에서 끊임없이 생성된다는 것이다.

이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기개념(self-concept)의 유동성과도 연결된다. 인간은 단일한 자아를 가지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행동하고, 다양한 역할 속에서 자기를 경험한다. 들뢰즈의 리좀적 사고는 이런 복잡성과 다양성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하는 개념이다.

차이와 반복: 본질보다 중요한 것은 ‘다름’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Difference and Repetition)’이라는 저서를 통해 전통 철학이 놓친 핵심을 지적했다. 기존 철학은 동일성과 본질을 강조했지만, 들뢰즈는 ‘차이 그 자체’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같은 단어를 반복하더라도 문맥이 다르면 그 의미는 달라진다. 반복 속의 ‘차이’가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심리학적으로 이는 개인의 반복되는 행동 패턴이 단순한 기계적 재현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새로운 해석과 감정을 동반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즉, 우리는 똑같은 행동을 반복해도, 거기에는 매번 새로운 의미와 정체성이 내포되어 있다.

심리학 관점에서 본 들뢰즈의 사상

정체성의 비고정성: 자아는 흐른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고정된 자아보다 ‘다중 자아’, ‘유동적 자아’, ‘역할 기반 자아’와 같은 개념이 주목받고 있다. 이는 들뢰즈가 말한 ‘정체성의 생성성’과 맞닿아 있다. 들뢰즈에 따르면 정체성은 하나의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되고 변화하는 흐름이다.

예를 들어, 사람이 특정한 직업을 가졌다고 해서 그 직업이 곧 그의 전부는 아니다. 그는 동시에 부모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으며, 취미를 가진 개인이기도 하다. 들뢰즈는 이런 복합적인 존재 상태를 인정하며, 자아를 ‘되기(becoming)’의 상태로 본다. 이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기통합(self-integration)이나 자기유연성(psychological flexibility)과 유사하다.

무의식과 들뢰즈: 억압 대신 생성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억압된 욕망의 저장소로 보았지만, 들뢰즈는 무의식을 창조적 생성의 장으로 보았다. 이는 정신분석학의 구조를 뒤엎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들뢰즈에 따르면, 인간의 무의식은 억제된 감정의 결과가 아니라, 외부 자극과 내면 세계가 끊임없이 연결되며 만들어내는 창조의 장이다.

이러한 시각은 심리 치료에서도 중요한 관점을 제공한다. 특히 현대 심리치료 기법에서는 무의식을 단순히 과거의 상처로만 보지 않고, 현재의 삶에서 새로운 가능성과 연결된 영역으로 본다. 들뢰즈 철학은 이와 같은 새로운 무의식 해석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준다.

결론: 들뢰즈 철학이 심리학에 주는 시사점

들뢰즈는 정체성을 단일하고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생성과 흐름, 그리고 차이의 연속으로 본다. 이러한 철학적 시각은 현대 심리학이 개인을 바라보는 관점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심리학은 더 이상 인간을 하나의 정해진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고, 개인의 맥락과 변화 가능성을 중시하고 있다. 들뢰즈의 철학은 이 같은 변화에 철학적 기반을 제공하며, ‘새롭게 되기(becoming)’를 통해 인간의 삶과 자아를 재조명할 수 있게 해준다.

마무리: 들뢰즈를 심리학적으로 조명하는 의미

질 들뢰즈의 철학을 심리학적으로 해석하는 일은 단순히 학문 간의 융합을 넘어서, 인간이라는 존재를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하려는 시도다. 고정된 자아 개념에서 벗어나, 생성되고 유동하며 끊임없이 바뀌는 인간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현재 심리학에서도 매우 중요한 변화 중 하나다. 들뢰즈는 그러한 변화를 이끄는 철학자였으며, 그의 사유는 여전히 지금 이 순간에도 의미 있는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앞으로의 심리학은 더욱 다양한 문화적,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인간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되기’, ‘차이’, ‘리좀’과 같은 들뢰즈의 개념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