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넘쳐나는 콘텐츠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공허함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콘텐츠를 소비하고 있다.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있는 한, 유튜브 쇼츠, 인스타그램 릴스, 틱톡, 스트리밍 서비스, 뉴스 기사, 웹툰, 팟캐스트 등 수없이 많은 콘텐츠가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손가락 한 번의 스크롤로 넘겨진다. 콘텐츠는 무한히 생성되며, 그 흐름은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점점 피로감을 느끼고, 무언가 ‘본 것 같은데 남지 않는다’는 허무함에 빠져든다. 정보는 넘치지만, 의미는 희미하다. 감각은 끊임없이 자극받지만, 마음은 쉽게 공허해진다.
이 현상을 단순히 ‘콘텐츠 과잉’이나 ‘주의력 결핍’ 문제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사유를 통해 이 문제를 다시 들여다보면, 지금 우리의 콘텐츠 소비 방식 자체가 갖는 구조적인 허무함을 철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 ‘되기’, ‘탈영토화’ 등의 개념을 통해 인간 존재와 감각, 시간성에 대한 전혀 다른 접근을 제안한다. 이 글에서는 들뢰즈 철학을 통해 디지털 시대의 콘텐츠 소비가 왜 허무하게 느껴지는지를 깊이 사유해보고, 그 속에 감춰진 철학적 통찰을 찾아본다.
1. 반복 속의 차이 없는 반복: 콘텐츠 피로의 철학적 원인
들뢰즈는 그의 저서 『차이와 반복』에서 인간은 반복을 통해 삶을 살아가지만, 진정한 반복은 단순한 복제가 아니라 차이를 창조하는 반복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반복은 그 자체로 차이를 생산하는 과정이어야 하며, 단지 똑같은 것을 다시 보는 행위는 반복이 아니라 퇴행이다.
그러나 오늘날 콘텐츠 소비는 대부분 차이 없는 반복으로 이루어진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사용자의 취향을 분석하여 유사한 콘텐츠를 연속적으로 보여주며, 이는 차이를 만들어내기보다는 기존 감각을 재생산한다. 우리는 마치 새로운 콘텐츠를 보는 듯하지만, 실상은 ‘비슷한 것의 반복’을 경험하고 있다. 이때 사람의 뇌는 자극은 받지만, 내면적 충격이나 창조적 사유는 발생하지 않는다.
들뢰즈는 진정한 반복이란, 반복 속에서 전혀 새로운 차원이 출현하는 사건이라고 본다. 그러나 디지털 알고리즘은 차이를 허용하지 않고, 가장 예측 가능한 형태로 콘텐츠를 배열한다. 이로 인해 사용자는 점점 더 피로해지고, 무언가를 계속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충족감은 점점 줄어든다. 콘텐츠는 많지만, 경험은 단조롭다. 이 반복은 존재의 깊이를 증폭시키지 않고, 오히려 얕은 감각만을 남긴다.
결국, 디지털 콘텐츠 소비의 피로감은 반복의 문제가 아니라, 차이 없는 반복의 문제다. 들뢰즈는 삶이란 차이의 흐름 속에서 의미를 생성한다고 보았다. 콘텐츠가 차이를 제공하지 않을 때, 인간은 자극받지만 성장하지 못하고, 연결되지만 고립된다.
2. ‘되기’ 없는 소비: 감각의 무뎌짐과 존재의 얕아짐
들뢰즈의 철학에서 또 하나의 핵심 개념은 ‘되기(becoming)’이다. 되기는 고정된 자아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접속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되는 존재 양식을 뜻한다. 되기는 삶의 깊이를 만드는 운동이며, 기존의 자아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체성의 가능성을 여는 창조적 사건이다.
그러나 콘텐츠 소비는 이 되기의 가능성을 억제한다. 우리는 콘텐츠를 소비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정보와 이야기, 감정을 접하지만, 그것이 우리 존재의 일부가 되기에는 너무 빠르고 얕게 스쳐 지나간다. 콘텐츠는 우리가 ‘되기’를 수행하기도 전에 다음 화면으로 넘어간다. 감정은 느끼기도 전에 소모되고, 생각은 정리되기 전에 덮인다. 이는 ‘되기’의 부재이며, 결국 인간이 고정된 감각 구조 안에 갇히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들뢰즈에게 되기는 하나의 도전이자 실험이다. 인간은 동물과 접속하며 ‘되기-동물’을, 어린이와 접속하며 ‘되기-아이’를 수행한다. 하지만 콘텐츠 소비자는 자신이 어떤 것과도 되기를 시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타자성을 자신의 감각 소비를 위한 도구로 활용하고, 결과적으로 더 고립된다.
감각이 얕아질수록 존재도 얕아진다. 콘텐츠는 많지만, 기억에 남는 것이 없고, 감동도 오래가지 않는다. 이는 되기를 통한 존재의 심화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어떤 존재와 ‘되기’를 수행할 때, 삶은 충만하고 깊어진다. 그러나 현재의 콘텐츠 구조는 이러한 되기를 방해하며, 표면적인 감각 소비에 인간을 고착시킨다.
3. 탈영토화 없는 흐름: 창조 아닌 자동생산의 시대
들뢰즈는 ‘탈영토화(déterritorialisation)’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이 기존의 질서나 고정된 구조에서 벗어나 새로운 지대를 창조하는 과정을 설명한다. 탈영토화는 단순한 탈출이 아니라, 낯선 것과의 접속을 통해 익숙한 것을 재구성하는 창조적 운동이다. 이는 자본주의, 언어, 예술, 존재 방식 전반에 걸쳐 적용 가능한 개념이다.
그러나 오늘날 콘텐츠 소비는 진정한 탈영토화를 허용하지 않는다. 콘텐츠는 개별 사용자에게 맞춤화된 익숙한 세계를 제공하며, 낯선 타자성과의 만남을 방해한다. 알고리즘은 사용자의 이전 행동을 기준으로 예측 가능한 콘텐츠를 배치하고, 사용자는 이미 예상 가능한 흐름 안에서 ‘편안하게’ 콘텐츠를 소비한다.
들뢰즈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러한 맞춤형 콘텐츠는 오히려 철저히 재영토화된 질서다. 인간은 새로운 지대를 탐험하는 대신, 감각적으로 안전하고 정서적으로 익숙한 공간만을 반복해서 순환한다. 탈영토화는 커녕, 더 정교한 방식으로 자신의 취향 속에 갇히는 구조다. 이 구조는 사고의 확장을 방해하고, 낯선 타자성과의 접속을 차단한다.
콘텐츠가 창조성을 담보하지 못할 때, 인간은 타자의 존재를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결국 스스로를 객체화하게 된다. 콘텐츠 생산자 역시 창조적 행위보다는 알고리즘에 최적화된 자동 생산을 추구한다. 이 모든 흐름은 들뢰즈가 경계한 자본주의 기계의 ‘기능적 재생산’과 유사하다.
결론: 우리는 콘텐츠를 소비하는가, 아니면 콘텐츠가 우리를 소비하는가?
질 들뢰즈의 철학은 단지 개념적 이론이 아니라, 오늘날의 디지털 현실을 해석하는 강력한 도구가 된다. 차이 없는 반복, 되기 없는 접속, 탈영토화 없는 흐름. 이 세 가지는 오늘날 콘텐츠 소비 구조가 인간의 감각, 시간, 존재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일수록, 진정한 ‘되기’는 사라지고 있다. 인간은 콘텐츠를 소비하면서도, 그것을 통해 존재를 심화하거나 새롭게 변화하지 못한다. 우리는 ‘정보’는 얻지만, ‘경험’은 남기지 못하고 있다. 들뢰즈는 존재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흐름이며, 접속이며, 창조적 사건이라 말한다. 그 흐름이 단절될 때, 인간은 자기 자신의 생성 능력을 잃고, 허무 속에 빠진다.
이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나는 콘텐츠를 소비하는가? 아니면 콘텐츠가 나를 소비하는가? 들뢰즈의 철학은 이 질문 앞에서, 진정한 ‘되기’를 수행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의 방향을 모색하라고 말한다. 그것은 더 많이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게 존재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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