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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들뢰즈 & 현대 사유

들뢰즈의 리좀 구조와 인터넷 네트워크의 유사성

by 둥둥팍 2025. 12. 14.

alt: 식물 뿌리처럼 연결된 네트워크 구조 이미지

 

철학과 기술, 구조의 언어로 만나다

21세기 디지털 사회는 기술과 철학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조우하는 시대다. 인터넷의 구조를 설명하는 기술적 언어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으며, 반대로 철학은 기술 세계의 구조를 해석하는 데 새로운 빛을 제공하고 있다. 그중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가 함께 제안한 개념인 리좀(Rhizome)은 오늘날의 인터넷 네트워크 구조와 놀라운 유사성을 보인다. 두 철학자는 그들의 저서 『천 개의 고원』(Mille Plateaux)에서 전통적 위계 구조가 아닌, 비선형적이고 탈중심적인 연결망을 설명하기 위해 리좀이라는 식물의 뿌리 구조에서 착안한 철학적 모델을 제시했다.

한편 인터넷 역시 중앙 통제 없이 전 세계의 컴퓨터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분산적 구조를 지닌다. 서버와 클라이언트, 노드와 링크, 하이퍼텍스트와 알고리즘 등 인터넷은 마치 리좀처럼 어디서든 연결이 가능하며, 어느 지점에서든 새로운 가지를 뻗는다. 이 글에서는 들뢰즈의 리좀 개념을 중심으로, 인터넷 네트워크 구조와의 철학적, 기술적 유사성을 탐색해본다. 이러한 비교는 단순한 형식적 유사성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디지털 사회에서 어떻게 존재하고 연결되며 사고하는지를 새롭게 이해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1. 리좀의 철학적 정의와 핵심 속성

‘리좀’은 본래 식물학 용어로, 줄기와 뿌리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고 여러 방향으로 자라는 덩굴식물의 구조를 의미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생물학적 개념을 철학적으로 확장하여 전통적인 구조주의적 사고방식에 도전한다. 기존의 지식 체계는 중심-주변, 원인-결과, 위계-하위와 같은 이항 대립적 구조를 기반으로 작동해왔다. 그러나 리좀은 이러한 위계 구조를 거부한다.

리좀은 다음과 같은 핵심 속성을 지닌다. 첫째, 탈중심성이다. 리좀에는 중심이 없다. 어느 지점이든 시작점이 될 수 있고, 그 자체로 중심이 될 수 있다. 이는 곧 중심을 향한 위계적 구조 대신, 다수의 중심들이 공존하는 구조를 뜻한다. 둘째, 다중 연결성이다. 리좀은 각 요소들이 서로 자유롭게 연결되며,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 노드 하나가 다른 여러 노드와 연결되어 새로운 의미망을 형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네트워크적 사유와 일맥상통한다.

셋째, 비선형성이다. 리좀의 연결은 선형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시작과 끝, 원인과 결과의 명확한 구분 없이, 모든 지점은 동시적으로 존재하며, 다양한 경로로 이동할 수 있다. 이러한 속성은 시간성과 공간성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요구하며, 탈구조주의적 사고의 중심이 된다. 마지막으로, 리좀은 영속적인 재조직화가 가능하다. 가지가 잘려 나가도 다른 방향으로 자라며, 새로운 연결을 생성해낸다.

들뢰즈는 이러한 리좀 구조를 통해 지식, 존재, 사유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려 했다. 정해진 규칙과 중심이 지배하는 트리(tree)형 구조가 아니라, 어디서든 연결되고 이동 가능한 비결정적 네트워크가 새로운 철학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2. 인터넷 네트워크 구조와 리좀의 기술적 평행성

인터넷은 본질적으로 리좀적이다. 인터넷의 구조는 중앙 통제자가 없는 분산형 네트워크이며, 개별 노드(컴퓨터, 서버, 장치 등)가 자유롭게 연결되며 정보를 교환한다. 이 구조는 물리적으로도 탈중심화되어 있으며, 설계 철학에서도 ‘자유로운 연결’과 ‘확장성’을 기본 원칙으로 한다. 이는 리좀이 지닌 탈중심성과 다중 연결성의 철학적 속성과 정확히 맞물린다.

예를 들어 웹사이트 간의 하이퍼링크는 특정한 선형 흐름을 따르지 않는다. 사용자는 A에서 B로, B에서 C로 이동하는 방식이 아니라, A에서 C, C에서 F로 점프하는 비선형적 이동이 가능하다. 이는 리좀이 주장하는 비선형적 사고와 자유로운 이동성의 구체적 구현이다. 인터넷은 정보를 트리 형태로 저장하지 않고, 리줌 구조처럼 상호 링크된 정보 노드를 통해 구성된다. 특히 위키피디아와 같은 플랫폼은 리좀의 구조를 거의 완벽히 반영한 지식 네트워크라 할 수 있다.

또한 인터넷은 끊임없이 새로운 연결을 생성하며, 외부로부터 잘려 나가거나 차단되어도 다른 경로를 통해 재구성된다. 이는 리좀의 속성 중 하나인 절단 가능성과 재연결성과 정확히 일치한다. DDoS 공격, 물리적 장애 등으로 일부 서버가 마비되더라도, 전체 네트워크는 여전히 작동 가능한 이유는 바로 이 분산형 구조 때문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리좀이 언제든 새로운 가지를 뻗어나갈 수 있는 ‘열림의 구조’라고 보았다. 인터넷 또한 언제든 새로운 사이트, 어플리케이션, 사용자, 기능이 덧붙여질 수 있는 확장 가능성을 갖는다. 사용자는 콘텐츠를 소비할 뿐 아니라, 직접 생산하고 연결시킬 수 있으며, 그 누구도 전체를 통제할 수 없다. 이는 정보의 민주화이자, 사유의 해방이다.

3. 디지털 사회의 리좀적 인간: 존재, 주체, 사유 방식의 변화

리좀과 인터넷의 구조적 유사성은 단순한 시스템 차원을 넘어, 인간 존재 방식에도 깊은 영향을 미친다. 디지털 시대의 인간은 더 이상 하나의 고정된 정체성을 갖지 않는다. SNS 프로필, 닉네임, 아바타, 댓글 속 말투 등 다양한 디지털 흔적들이 인간의 다중적 자아를 구성한다. 이러한 자아는 들뢰즈가 말하는 ‘고정되지 않은 주체’, ‘되기의 연속성’을 그대로 반영한다.

인터넷 사용자는 리좀적 인간이다. 그는 언제든 다른 커뮤니티로 이동하고, 다른 이름으로 활동하며, 다른 정체성을 수행할 수 있다. 그는 특정한 서사나 기준에 의해 고정되지 않으며, 필요와 욕망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한다. 이러한 존재 양식은 들뢰즈가 전통 철학이 강요한 단일 정체성을 해체하고, 복수의 접속과 흐름 속에서 새로운 존재론을 상상하려 했던 이유와 맞닿아 있다.

사유 방식 또한 리좀화되고 있다. 전통적 교육은 논리적이고 선형적인 사고를 강조했다. 하지만 인터넷 환경에서는 다양한 정보가 동시에 존재하며, 사용자는 이를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재조합해야 한다. 이는 ‘선형적 사고’에서 ‘네트워크적 사고’로의 전환이며, 리좀적 사유의 일상화라고 볼 수 있다. 유튜브의 알고리즘 추천, 브라우저의 다중 탭 탐색, 링크드인 프로필처럼 연결 기반의 사고는 이미 우리의 인식 구조를 바꾸고 있다.

리좀의 철학은 단지 구조를 설명하는 언어가 아니라,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을 바꾸는 새로운 존재론이다. 우리는 이제 ‘누구인가?’보다 ‘어떻게 연결되는가?’, ‘무엇과 접속되는가?’를 중심으로 자기 자신을 정의하게 되었다. 이는 곧 존재론의 네트워크화이며, 철학과 기술의 새로운 융합 지점이라 할 수 있다.

결론: 리좀과 인터넷, 새로운 연결의 철학

들뢰즈의 리좀 개념은 철학적 개념이자, 21세기 디지털 네트워크 사회를 해석할 수 있는 강력한 메타포이다. 인터넷은 기술적으로 리좀적 구조를 실현하고 있으며, 인간은 이 구조 속에서 리좀적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연결은 이제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존재 방식이며, 사고 방식이며, 정체성의 토대가 되었다.

철학과 기술은 더 이상 서로 무관하지 않다. 오히려 철학은 기술의 구조를 해석하고, 기술은 철학적 개념을 구현하는 방식으로 상호작용한다. 들뢰즈의 리좀은 이제 사유의 방식에서 머무르지 않고, 디지털 현실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 우리는 모두 이 거대한 리좀 속에서 연결되고, 확장되고, 끊임없이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결국 리좀은 단지 하나의 철학적 모델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구조 그 자체다. 그 구조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자만이, 디지털 시대의 사유자이자 실천가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