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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들뢰즈 & 현대 사유

‘되기-아이’란 무엇인가? 들뢰즈 철학으로 본 성장의 의미

by 둥둥팍 2025. 12. 7.

아이의 실루엣이 나무로 성장하는 형상의 이미지

들뢰즈의 ‘되기-아이’ 개념으로 다시 묻는 성장의 의미

이 글은 들뢰즈 철학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인 ‘되기(becoming)’, 그중에서도 특히 ‘되기-아이(becoming-child)’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현대인이 당연하게 여겨 온 ‘성장’의 의미를 다시 묻는 시도입니다. 많은 사람은 성장과 성숙을 “아이에서 어른으로 나아가는 직선적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의 감수성과 상상력은 어릴 때 잠깐 허용되는 것으로 여겨지고, 이후에는 이성적이고 효율적인 어른의 세계에 적응하는 것이 목표처럼 제시됩니다. 그러나 들뢰즈는 이런 통념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들뢰즈에게 중요한 것은 “완성된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나로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되기-아이’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이 글은 먼저 서론에서 왜 지금 ‘되기-아이’라는 들뢰즈 철학 개념을 소환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 개념이 현대인의 삶과 어떤 접점을 가지는지 설명합니다. 본론 1에서는 들뢰즈 철학에서 ‘되기’가 의미하는 바를 정리하고, ‘되기-아이’가 단순히 다시 어린아이가 되자는 말이 아니라는 점을 차근차근 풀어냅니다. 본론 2에서는 ‘되기-아이’ 관점을 오늘의 성장 서사, 교육, 육아, 성인기의 일과 관계에 적용하여,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조금 다르게 상상해 봅니다. 마지막으로 결론과 마무리에서는 들뢰즈가 던지는 질문들을 정리하고, 일상에서 실천해 볼 수 있는 매우 작은 ‘되기-아이’의 연습들을 제안합니다.

들뢰즈가 던지는 질문, “정말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현대 사회에서 성장과 성숙은 거의 의무처럼 여겨집니다. 사람은 “이제 철들어야 한다”, “이제 어른이니까 책임져야 한다”와 같은 말을 들으며 자랍니다. 이 말들에는 암묵적인 전제가 숨어 있습니다. 아이의 세계는 미숙하고 부족하며, 언젠가는 버려야 할 상태라는 전제입니다. 반대로 어른의 세계는 완성되고 정상적인 상태처럼 그려집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요구되는 것은 “빨리 어른이 될 준비를 하는 것”이고, 어른에게 요구되는 것은 “더 이상 아이처럼 굴지 않는 것”입니다.

질 들뢰즈는 이런 이분법적인 생각을 평평하게 만들고자 했던 철학자입니다. 들뢰즈는 “어른 vs 아이”, “성숙 vs 미숙”이라는 단순한 대립 구조 대신, 서로 다른 상태들이 끊임없이 섞이고 이동하는 흐름에 주목합니다. 들뢰즈에게 사람은 한 번 어른이 되고 나면 그대로 고정되는 존재가 아니라, 어떤 순간에는 아이 쪽으로, 어떤 순간에는 노인 쪽으로, 또 다른 순간에는 동물이나 사물의 감각 쪽으로도 ‘되어 가는’ 존재입니다. 그중 ‘되기-아이’는, 정해진 역할과 정답에 익숙해진 어른이 다시 세계를 새롭게 감각하고 상상하는 힘을 회복하는 통로와 같습니다.

서론에서 이 글은 하나의 간단한 질문을 던집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아이였던 나를 버리는 일인가, 아니면 아이였던 나를 다른 방식으로 품고 가는 일인가?” 들뢰즈의 ‘되기-아이’는 분명 두 번째 쪽에 가깝습니다. 이 개념을 통해 우리는 아이, 어른, 성장, 성숙이라는 익숙한 단어들을 다시 정의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재정의는 공부, 일, 관계, 삶 전체를 바라보는 눈을 조금씩 바꾸어 줄 수 있습니다.

들뢰즈 철학에서 ‘되기’와 ‘되기-아이’의 철학적 의미

들뢰즈의 ‘되기’ 개념 이해하기

들뢰즈의 ‘되기’와 단순 성장의 차이

들뢰즈 철학에서 ‘되기’는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입니다. 사람은 흔히 ‘성장’을 떠올릴 때 단계와 목표를 상상합니다. 초등학생에서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직장인으로 이어지는 단계, 또는 사원에서 대리, 과장, 팀장, 임원으로 이어지는 경력 단계가 있습니다. 이러한 성장 모델은 위계를 전제합니다. 아래 단계는 덜 발달한 상태이고, 위 단계는 더 나은 상태로 간주됩니다. 이 구조에서는 “어른”이 “아이”보다 항상 우위에 있고, 성장의 끝에 가까운 상태로 상상됩니다.

들뢰즈의 ‘되기’는 이런 단계적이고 위계적인 성장 모델과 거리를 둡니다. 들뢰즈에게 ‘되기’는 어떤 고정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직선이 아닙니다. ‘되기’는 방향을 예측하기 어려운 변화, 옆으로 흐르는 이동, 기존 범주로 설명하기 힘든 변형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특정한 사건을 겪고 나서 전혀 다른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선택하게 되는 순간, 들뢰즈는 그 변화를 “성장했다”라기보다 “다른 무엇이 되어 갔다”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때 중요한 점은, 들뢰즈의 ‘되기’에는 위아래의 위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되기’를 통해 더 나은 존재가 된다고 말하기보다, 더 복잡하고 다층적인 존재가 되어 갑니다. 그래서 ‘되기-아이’ 역시 ‘아이 상태로 되돌아가는 퇴행’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들뢰즈의 ‘되기-아이’는 아이의 특정한 힘, 즉 세계를 처음 보는 눈, 규칙에 갇히지 않은 상상력, 아직 덜 나뉘어진 감각을 어른의 삶 속으로 들여오는 운동에 가깝습니다.

들뢰즈의 ‘되기’와 다중성, 흐름의 사유

들뢰즈는 세계를 고정된 실체들의 모음이 아니라, 관계와 흐름의 집합으로 보았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하나의 단단한 나”가 아니라, 수많은 관계와 역할, 감정과 기억이 얽혀 있는 다중적인 존재입니다. 들뢰즈의 ‘되기’ 개념은 바로 이 다중성을 드러내는 개념입니다. 사람은 상황에 따라, 관계에 따라, 시기에 따라 다른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변화는 가식이나 거짓이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가 가진 자연스러운 특성입니다.

‘되기’는 이런 다중성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는 제안입니다. 사람은 어제와 같은 자신을 유지하려 애쓰기보다, 오늘의 상황이 요구하는 다른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습니다. 들뢰즈의 ‘되기-아이’는 이 다중성 가운데 하나의 흐름입니다. 사람은 어떤 순간에는 ‘되기-여성’, ‘되기-동물’, ‘되기-노인’, ‘되기-아이’와 같은 다양한 흐름을 경험합니다. 그중 ‘되기-아이’는 특히 상상력, 감수성, 유연한 시간 감각과 연결된 흐름입니다.

들뢰즈의 ‘되기-아이’ 개념이 말하는 것

들뢰즈가 본 아이의 감각, 상상력, 리듬

아이를 떠올리면 사람은 흔히 “미숙함”과 “순수함”을 함께 떠올립니다. 들뢰즈에게 아이는 단순히 보호받아야 할 미숙한 존재가 아닙니다. 아이는 세계를 어른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는 존재입니다. 아이에게는 규격화된 시간표와 생산성 계산보다, 지금 이 순간의 강도와 흥미가 더 중요합니다. 돌길을 걷다가도 작은 돌멩이 하나에 멈춰 설 수 있고, 길가의 개미 떼를 관찰하느라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들뢰즈는 이런 아이의 감각과 상상력, 리듬에 주목합니다. 아이는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방식에서도 어른과 다릅니다. 어른이 하나의 사물을 하나의 이름과 기능으로 고정한다면, 아이는 그 사물을 가지고 여러 놀이를 만들어 냅니다. 막대기는 검이 되었다가 마이크가 되고, 마법지팡이가 됩니다. 들뢰즈가 말하는 ‘되기-아이’는 이런 상상력과 유연한 리듬을 어른의 삶 속에 다시 불러들이는 운동입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세계를 한 번 더 처음 보는 것처럼 바라볼 수 있고, 일상적인 사물과 시간 속에서 새로운 놀이와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들뢰즈의 ‘되기-아이’와 소수적인 것, 약한 것의 힘

들뢰즈는 종종 “소수적인 것(minoritarian)”의 힘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소수는 숫자가 적다는 의미를 넘어, 지배적인 규범에 속하지 않는 존재들을 가리킵니다. 아이는 대표적인 소수적 존재입니다. 아이는 사회의 중심 권력을 쥐고 있지 않지만, 그 주변에서 새로운 표현과 가능성을 끊임없이 만들어 냅니다. 아이의 말투, 놀이 방식, 관계 맺기는 자주 어른의 상식과 어긋납니다. 바로 그 어긋남 속에 새로운 세계의 씨앗이 숨어 있습니다.

‘되기-아이’는 약해 보이는 것, 미숙해 보이는 것, 주변에 있는 것 속에서 새로운 힘을 발견하는 태도입니다. 사람은 스스로에게서도 그런 부분을 찾을 수 있습니다. 너무 감정적인 면, 쓸데없어 보이는 상상, 생산성과 무관한 취미, 어른스럽지 않아 보이는 취향 등은 종종 숨겨야 할 약점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들뢰즈 관점에서 이런 요소들은 ‘되기-아이’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이 통로를 통해 기존의 질서에 균열을 내고, 자신만의 길을 조금씩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들뢰즈의 ‘되기-아이’와 정체성 재구성

들뢰즈의 정체성 비판 – ‘완성된 나’라는 환상

많은 사람은 “나라는 사람은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합니다. 이 말에는 정체성이 이미 완성된 상태로 존재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질 들뢰즈는 이런 정체성 개념을 강하게 의심합니다. 들뢰즈에게 사람은 하나의 중심을 향해 수렴하는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발산하고 변형되는 존재입니다. 정체성은 단단한 실체라기보다, 여러 관계와 선택이 잠정적으로 만들어 낸 지도에 가깝습니다.

들뢰즈가 보기에 ‘완성된 나’라는 생각은 사람을 쉽게 지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사람은 스스로를 규정한 틀 안에 머무르려 하고, 그 틀과 어긋나는 감정과 욕망을 억누르려 합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야”라는 말은 때로 자기 이해의 문장을 넘어, 자기 검열의 문장이 되기도 합니다. 들뢰즈 철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되기-아이’를 떠올리게 합니다. 아이는 아직 자신을 하나의 문장으로 정의하지 않습니다. 아이는 지금 하고 싶은 것, 느끼는 것, 궁금한 것에 따라 계속해서 다른 모습이 됩니다. 들뢰즈는 이 유연함을 정체성의 이상으로 삼습니다.

들뢰즈의 ‘되기-아이’가 제안하는 열린 정체성

들뢰즈의 ‘되기-아이’는 정체성을 없애자는 주장이 아닙니다. 대신 정체성을 “닫힌 결과”가 아니라 “열린 과정”으로 보자는 제안입니다. 사람은 여러 번의 선택과 경험을 통해 자신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듭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언제든 수정될 수 있고, 새로운 요소가 추가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중간에 전혀 다른 직업을 선택할 수도 있고, 이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예술을 사랑하게 될 수도 있고, 생각하지 못했던 관계에서 자신을 새롭게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되기-아이’는 이런 열린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연습입니다. 사람은 스스로에게 “나는 이미 다 정해진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해 볼 수 있습니다. 도리어 “아직도 많은 것이 남아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아이’는 완성되지 않았다는 결핍의 상징이 아니라, 열려 있는 가능성의 상징이 됩니다. 들뢰즈의 ‘되기-아이’는 사람에게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변화할 수 있고, 여전히 새로워질 수 있다는 용기를 줍니다.

들뢰즈의 ‘되기-아이’로 다시 보는 현대인의 성장과 삶

들뢰즈의 ‘되기-아이’와 성장 신화 해체

들뢰즈 관점에서 본 직선적인 성장 서사의 한계

현대 사회는 직선적인 성장 서사를 좋아합니다. 사람은 학업 성취, 연애, 결혼, 출산, 내 집 마련, 승진과 같은 일련의 마일스톤을 자연스러운 인생 코스로 제시받습니다. 이 코스에서 벗어나는 선택은 때로 “늦었다”, “어긋났다”, “위험하다”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런 서사 속에서는 아이에서 어른으로, 미숙에서 성숙으로 나아가는 것이 당연한 진보처럼 보입니다.

질 들뢰즈의 ‘되기-아이’는 이 직선 서사에 균열을 냅니다. 들뢰즈 관점에서 사람의 삶은 단계가 아니라 다층적인 지도에 가깝습니다. 사람은 어떤 영역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어른이지만, 다른 영역에서는 여전히 아이 같은 상태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에서는 책임감 있고 냉정한 어른으로 행동하지만, 사랑 앞에서는 서툴고 두려운 아이로 머무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감정과 공감 능력에서는 성숙하지만, 사회적 역할에서는 아직 시행착오를 겪는 사람도 있습니다. 들뢰즈의 ‘되기-아이’ 개념은 이 복잡성을 인정하라고 말합니다.

들뢰즈의 ‘되기-아이’와 나선형 성장의 가능성

들뢰즈 관점에서 이상적인 성장은 직선이 아니라 나선에 가깝습니다. 사람은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 다른 높이와 시선에서 다시 그 자리를 지나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에 즐기던 놀이를 성인이 되어 다시 시작했을 때, 사람은 같은 행위를 하면서도 전혀 다른 의미를 느낍니다. 아이 때는 그저 재미있어서 했던 행동이, 이제는 자신을 지키는 쉼의 시간, 관계를 이어 주는 매개, 창조적 영감의 출처가 될 수 있습니다.

‘되기-아이’는 이런 나선형 성장의 가능성을 여는 개념입니다. 사람은 “이제 다 큰 어른이니 이런 행동은 하면 안 돼”라고 스스로를 막기보다, “이 나이에 다시 해 보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라고 물어볼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을 통해 어린 시절의 경험은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새롭게 구성하는 자원이 됩니다. 들뢰즈 철학은 이런 방식의 성장을 더 정직하고 풍부한 성장으로 봅니다.

들뢰즈 ‘되기-아이’와 교육, 육아, 학습의 재구성

들뢰즈의 ‘되기-아이’로 본 학교 교육의 과제

학교는 흔히 아이를 ‘어른으로 만드는 준비 공간’으로 상상됩니다. 이런 관점에서는 아이의 현재보다 미래의 성취가 더 중요하게 여겨지고, 아이의 오늘은 내일을 위한 투자처럼 취급됩니다. 시험과 진로, 스펙과 경쟁이 교육의 중심 언어가 되면, 아이의 지금 여기에서의 감각과 질문, 호기심은 쉽게 무시됩니다.

질 들뢰즈의 ‘되기-아이’는 학교 교육에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교육은 아이를 빨리 어른으로 만드는 작업인가, 아니면 아이와 함께 ‘되기’의 과정을 경험하는 작업인가?” 들뢰즈식 교육은 아이의 시간을 미래의 도구로만 보지 않습니다. 아이가 지금 무엇을 느끼는지, 어떤 세계를 보고 있는지, 어떤 질문을 품고 있는지를 존중합니다. 교실은 “언젠가 사회에 나가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준비 공간”이기 이전에, “지금 이 순간 세계와 만나고 변화하는 공간”이 됩니다.

들뢰즈 관점의 양육 – 아이를 ‘어른 만들기’ 대신 함께 ‘되기’

양육에서도 들뢰즈의 ‘되기-아이’는 중요한 시사를 줍니다. 많은 보호자는 아이를 “언젠가 어른이 될 존재”로 바라보며, 지금의 아이에게 조급하게 어른스러움을 요구합니다. “이제 그런 나이는 지났어”, “남자는, 여자는 이렇게 해야 해”라는 말 속에는 어른의 기준에 맞춰 아이를 끌어올리려는 압력이 담겨 있습니다.

들뢰즈 관점에서 양육은 아이를 특정한 어른의 모델에 맞추는 작업이 아니라, 보호자 스스로도 함께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아이는 보호자에게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게 하고, 잊고 살았던 감정과 상상을 불러냅니다. 보호자는 아이를 돌보면서 동시에 자신 안의 ‘되기-아이’를 다시 경험하게 됩니다. 이때 양육은 일방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함께 변화하고 배우는 상호적인 과정이 됩니다. 들뢰즈 철학은 이러한 상호성을 인식할 때, 양육의 피로와 죄책감이 조금 덜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보호자는 “완벽한 어른”이 되어 아이를 이끌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아이와 함께 흔들리며 배우는 동행자가 됩니다.

들뢰즈 ‘되기-아이’와 성인기의 삶, 일, 관계

들뢰즈의 ‘되기-아이’와 일, 커리어 설계의 전환

성인이 된 이후에도 사람은 끊임없이 “더 성숙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습니다. 일터에서는 계산과 효율, 성과와 책임이 강조되고, 감정과 상상, 놀이의 요소는 주변으로 밀려납니다. 하지만 동시에 현대의 많은 사람은 일에서 의미를 찾고 싶어 하고, 일과 삶이 너무 멀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딜레마 속에서 들뢰즈의 ‘되기-아이’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합니다.

‘되기-아이’는 일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발휘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단순히 주어진 업무를 처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업무 안에서 작은 놀이와 실험의 여지를 만들 수 있습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일을 정리해 보거나, 동료와 함께 다른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거나, 필요 이상으로 아름다운 문장을 쓰는 것조차 ‘되기-아이’의 흔적입니다. 이런 시도는 당장의 성과와 관계없어 보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창의성과 회복탄력성을 키워 줍니다. 들뢰즈 철학은 삶과 일이 기계적인 의무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성인이 자신의 ‘되기-아이’를 잘 돌봐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들뢰즈의 ‘되기-아이’와 놀이, 성인기의 진짜 여유

성인이 된 사람은 종종 “놀면 죄책감이 든다”고 말합니다. 해야 할 일은 늘 많고, 시간은 부족하며, 쉼과 놀이는 나중으로 미뤄집니다. 그러나 들뢰즈의 ‘되기-아이’를 떠올리면, 놀이는 사치가 아니라 삶을 살아 있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아이는 놀이를 통해 세계를 배우고, 자신을 시험하고, 감정과 상상력을 표현합니다. 성인에게도 놀이는 비슷한 역할을 합니다. 놀이 속에서 사람은 다시 규칙을 만들어 보고, 실패를 안전하게 경험하며, 새로운 관계를 맺습니다.

들뢰즈 철학은 성인이 아이처럼 아무 이유 없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림을 그리거나, 악기를 연주하거나, 게임을 하거나, 아무 목적 없이 산책을 하는 행동 모두 ‘되기-아이’의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생산성과 효율의 언어로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사람의 내면을 지탱하는 힘을 제공합니다. 성인이 자신의 놀이를 허락할 때, 삶은 단지 버티는 시간이 아니라, 조금씩 새로워지는 시간이 됩니다.

들뢰즈의 ‘되기-아이’가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

이 글은 들뢰즈 철학의 ‘되기’와 ‘되기-아이’ 개념을 통해 성장과 성숙, 아이와 어른, 교육과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질 들뢰즈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보다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가”입니다. ‘되기-아이’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니라, 아이의 감각과 상상력, 유연함을 현재의 삶 속에서 다시 불러오는 실천입니다. 그 실천은 정체성을 새롭게 구성하고, 성장 서사를 나선형으로 바꾸며, 교육과 양육, 일과 관계를 조금씩 다르게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들뢰즈의 ‘되기-아이’는 우리에게 몇 가지 질문을 남깁니다. 나는 언제부터 “어른이니까 이러면 안 된다”는 말로 나를 막기 시작했는가? 나는 어떤 지점에서 스스로를 “이미 다 정해진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는가? 나는 지금도 우연한 만남과 작은 놀이 속에서 새롭게 변할 수 있다고 믿는가? 이 질문들은 단번에 답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질문들을 품은 채로 살아가는 태도 자체가 ‘되기-아이’의 한 형식입니다.

들뢰즈 ‘되기-아이’를 일상에서 실천하는 작은 방법들

마무리에서 이 글은 들뢰즈의 ‘되기-아이’를 거창한 철학적 프로젝트가 아니라, 일상에서 실천해 볼 수 있는 작은 습관으로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사람은 하루 중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아무 쓸모 없어 보이는 행동”을 허용할 수 있습니다. 낙서를 하거나, 쓸데없이 먼 길로 돌아가거나,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시간은 모두 ‘되기-아이’의 통로입니다. 이 시간은 표면적으로는 비효율적이지만, 내면의 숨을 고르게 해 줍니다.

둘째로, 사람은 스스로에게 “왜?” 대신 가끔은 “하면 안 될 이유가 꼭 있을까?”라고 물어볼 수 있습니다. 새로운 취미를 시작하고 싶을 때, 직업과 상관없는 공부를 해 보고 싶을 때,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던 스타일을 시도해 보고 싶을 때 ‘되기-아이’는 조용히 등을 떠밉니다. 셋째로, 사람은 아이와 청년, 혹은 자기보다 어린 세대와의 대화를 통해 자기 안의 ‘되기-아이’를 자극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언어와 감각을 단순히 “철없다”고 평가하기보다, 새로운 감각의 출현으로 바라볼 때, 사람은 자신의 감각을 조금씩 확장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은 가끔 자신의 과거 사진이나 일기를 보면서 그때의 자신에게 말을 걸어 볼 수 있습니다.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보면 뭐라고 말할까?” 이 질문은 나이와 상관없이 여전히 진행 중인 ‘되기-아이’를 느끼게 해 줍니다. 질 들뢰즈 철학은 사람에게, 완성된 어른의 이미지에 맞추어 스스로를 다듬기보다, 여전히 변화할 수 있는 존재로 자신을 대하라고 제안합니다. 이 제안을 마음 한쪽에 품고 살아갈 때, 성장과 성숙은 더 이상 아이를 버리는 과정이 아니라, 아이와 함께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여정이 될 수 있습니다.